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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진 Feb 24. 2023

연봉은 쌓아나가는 것이 아닌 짊어지는 것

올리면 올릴수록 좋지만, 올려도 올려도 만족이 없는 연봉 딜레마

1월 말에서 2월. 블라인드, 리맴버와 같은 회사 커뮤니티를 뜨겁게 달구는 주제가 있다. 연봉과 성과급이다. 


올해 연봉협상은 망했다는 글부터, 실제 본인 연봉을 오픈하는 글, 성과급 얼마 받았다는 글 등 다양한 글이 게시판에 올라온다. 글 속에는 자랑과 성취, 인정, 궁금증, 비교, 자기 위로 등 다양한 의도와 감정이 서려있다.


일 년에 한 번 성장과 성과, 그리고 돈 이야기가 난무하는 연봉협상 자리. 자세히 들여다보면 승자도 패자도, 답도 없는 협상 테이블을 10년 넘게 지나쳐오며 느낀 연봉에 대한 내 생각을 적어본다.




몇 년 된 것 같다.

회사가 제시하는 연봉에 토 달지 않고 "네, 감사합니다."라고 말해온 지.


매 번 높은 연봉을 제시받은 것 아니냐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한 회사에서 5~6년 정도 다녀본 사람은 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세상에 100% 만족스러운 연봉협상은 없다. 연봉은 언제나 목마르다.


나도 한때는 연봉협상이 게임이나 토론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기고 지는 것이 명확한 서로가 서로를 설득하며 딜을 치는 게임. 무조건 더 많이 받아야 하는 게임. 바람의 나라 아이템 거래 같았다.


연봉에 대한 내 가치관이 왜 변했지? 생각하면 두 가지가 떠오른다. 하나는 좋아하는 이사님과의 술자리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전 직장을 퇴사한 이유다.


5년 전 이런 연봉협상 시즌이었던 것 같다. 술자리에서 연봉협상 이야기가 나왔었고, 당시 이사님은 "대표님이 내 희망연봉 물어보면, 난 그냥 주는 대로 받겠다고 말한다."라고 하셨었다. 이유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날 술을 너무 많이 먹어 까먹은 것인지, 아니면 당시에 궁금하지 않아서 더 물어보지 않은 것인지 모르겠다.


회사에 돈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고, 그 가치를 돈 때문에 잃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을까? 그 가치는 무엇일까? 조직일까? 추억일까? 커리어일까? 관계일까? 업적일까? 아니면 오너에 대한 신뢰일까? 뭐든 돈으로 가치를 매길 수 없는 무엇인가 있으셨던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내가 지금 회사에 돈 이상의 가치를 찾은 것처럼.


내가 전 직장을 퇴사한 이유는 생각보다 심플했다. 일이 재미있지 않았다. 일이 재미있지 않은 이유도 심플하다. 내가 일을 못하니까. 마케팅이라는 넓은 업무 범위에서 내가 갈고닦아왔던 마케팅적 역량은 당시 회사에서 당장 필요로 하고 요구하는 마케팅 역량과 달랐다. 그 역량 개발에는 시간이 필요했고 나는 그 시간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꾸준히 노력했으면 더 성장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난 재미를 붙이지 못했고, 이젠 다 지난 일이다. 


업의 특성이나 포지션만 놓고 보면 페이적으로 포텐셜이 있는 직장이었다. 하지만 느꼈던 것 같다, 이건 터지지 않을 포텐셜이고, 구체적인 일을 보지 않고 페이적인 부분만 보고 이직했다는 것을. 연봉이나 페이나 돈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내가 퇴사를 생각할 때 많이 하는 생각 중 하나가 이것이다. 

"밥값을 하고 있는가." 


내 존재가 후배들의 연봉을 갉아먹고 있지는 않는가. 저들의 성장을 가로막고 있지는 않은가. 내가 회사에 충분히 연봉에 맞는 성과를 제공했는가. 팀원이나 동료들이 나를 보고 '저 사람 왜 저 위치에 있는지 모르겠다.' '하는 것도 없이 월급만 받아 간다.'라고 생각하는 것을 견딜 수 없다. 


그래서 전 직장을 퇴사할 때 당장 필요한 역량을 당장 제공하지 못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고, 전전 직장을 퇴사할 때 '내가 보틀넥인 것 같다.'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물론 이것만 가지고 퇴사를 결정한 것은 아니지만..


연봉은 쌓아가는 것이 아니라 짊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연봉은 내가 작년에 열심히 일한 것에 대한 대가와 보상이 아니라, 내가 책임질 수 있는 것의 크기가 곧 연봉의 크기라고 생각한다. 책임질 수 있는 것의 범위는 다양하다. 일, 돈, 사람, 조직, 궂은일을 대하는 자세, 꺾이지 않는 마음까지.


누군가 나를 보았을 때 많은 것들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 나라면 해낼 것 같다는 이미지를 주는 사람, 힘들 때 기댈 수 있는 사람으로 봐주기를 바란다. 이를 위해 나름 노력하고 있으며, 웃긴 말이지만 노력을 멈추지 않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여담인데.. 몇몇 후배들이 말했다. 팀장님은 연봉협상을 어떻게 준비하시냐고. 말을 잘하고 논리적이시니까 연봉 협상을 잘하실 것 같다고. 화려한 언변으로 원하시는 결과를 얻을 것 같다고.


거기에 이렇게 말했다. 연봉을 올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연봉 협상을 잘 준비하는 게 아니라 성장하고 실력을 올리는 거라고. 


하... 말할 땐 개 멋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이불을 개 걷어차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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