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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진 Nov 20. 2023

노인을 위한 브랜드는 없다.

정지원, 유지은, 엄선형의 '뉴그레이'를 읽고

명대사가 많은 책이다. 그중 가장 눈길을 끌었던 두 문구를 합치면 이렇다.


'젊든 늙든 사람의 욕망은 다르지 않다. 건강, 안전, 편리는 욕망의 대상이 아닌 전제 조건일 뿐, 그들은 안전한 캠핑카가 아니라 누워서 밤하늘을 볼 수 있는 캠핑카에 욕망을 가진다.'




모든 업계가 그렇겠지만.. 트렌드에 나름 민감한 광고업계에 있다 보니 최근 3년은 뭐랄까.. MZ의 망령에 사로잡혀 일을 했던 것 같다. 모든 마케팅이 MZ를 향해있었고, 모든 마케팅은 MZ를 위해 존재했었다. 그러다 가끔 깨닫는다. M이 지칭하는 밀레니얼 세대의 최고 연장자가 만 42세라는 것을. 


주변에 광고 일을 했던 선배들을 보면 책에서만 봤던 영포티가 체감된다. 마케팅 시장은 '자기 주관이 확고하고 본인만의 취향을 가진 세대로 MZ세대를 주로 지칭'한다. 하지만 인스타를 보면 느껴진다. 트렌드, 유행, 자본주의 마케팅 메시지에 휘둘리지 않고 본인의 좋고 싫음이 명확한 사람들은 오히려 4050 세대이다.


선배들의 대다수는 오마카세, 탕후루, 마라탕, 핫플, 호캉스, 골프 등 요즘 힙하다고 하는 활동을 '나도 해봤다!'라고 도장 깨기 하듯 올리지 않더라. 그보다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자주 올린다. 술자리가 매일 올라오거나, 스킨스쿠버 하는 것이 몇 년째 올라오거나, 본인이 하는 일이 매 번 올라오거나. 본인이 몸 담고 있는 모임들을 매주 올리거나..


취향/개성이 확고하다는 느낌은 새로운 것에 대하여 가장 먼저 향유하는 모습을 통해 느껴지기도 하지만, 남들이 별로 관심 없어하는 것에 과할 정도로 집중하고, 꾸준히 하는 모습을 통해서도 느낄 수 있다. 나는 이게 '좋고 싫음이 명확해지는 단계'라고 생각한다.


그래서일까? 어른들과 이야기하면 말에 고집, 강단, 확신 같은 것들이 꽤 강하게 묻어 있다. '좋고 싫음'이 '맞고 틀림'을 지나 '옳고 그름'의 영역까지 침범하며, 자신의 취향을 누군가에게 아묻따 권유하는 것을 보면 40~60대가 개성이 뚜렷하다는 말이 십분 공감된다. 

모두의 극딜에도 불구하고 무한도전 쉼표 특집에서 "가래떡은 간장 찍어 먹어야해." 라고 외치는 정준하(출처: 무한도전)




실버 마케팅 산업을 들여다보면 대부분 두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대부분의 소비자에게 어필하는 메시지가 '안전하고 편안합니다.'라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너무 럭셔리, 고급화 시장'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두 가지 특징이라고 말했지만 어찌 보면 두 가지 편견이다. '5060대 돈 쓰는 뉴그레이는 돈이 많고, 사치를 즐긴다는 편견.' '나이 든 사람한테는 안전하고 편안한 게 무조건 장땡이라는 편견.' 책에서 이런 편견을 깨 주는 이야기를 수시로 해주는 것이 좋았다. 


뉴그레이를 위한 옷을 만든다고 했을 때 무겁지 않고, 움직이기에 편안하고, 관절을 잡아주는 기능이 있어야 하는 것은 기본이다. 댄디하고 단정해 보이는 옷이던, 가죽 소재를 활용하여 남성미 가득한 옷이던, 뉴그레이를 위한 옷도 멋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맥락의 이야기.


마케팅 시장에서 타깃으로 표현되는 뉴그레이는 대부분 대기업 총수나, 이미 은퇴한 부유층 사업가로 묘사되고 있는데, 65세 이상 80%를 차지하는 부유 하지도 병약하지도 않은 보통의 노인을 위한 시장은 아직 열리지도 않았다는 촌철살인의 이야기.


모두 인사이트가 넘치는 이야기다. 어른을 위한 무신사가 없다. 60대 시니어 모델을 위한 옷이 아닌, 한사랑 산악회 김영남 회장의 등산복 패션이 아니면 배용길 집사의 중절모 멋쟁이 패션 중에서만 옷을 골라야 한다. 정작 동네 아저씨를 위한 옷은 없는 것이다. 

노중년의 대표적인 패션을 보여주는 한사랑 산악회 콘텐츠 (출처: 피식대학 한사랑 산악회)


이 책을 읽고 있어서였을까? 최근 대기업 맥주 브랜드로 이직한 형과의 술자리에서 나온 이야기에 나는 격한 공감을 했었다.


"어떤 맥주는 회식을 하지 말라는 슬로건으로 광고를 하고, 어떤 맥주들은 본질을 잊고 젊은 층 공략을 위한 콜라보레이션에만 급급하고, 그런데 요즘 친구들은 하이볼을 먹는다. 저출산에 줄어드는 20대 인구를 타게팅하는 것이 맞을까? 아니면 머리가 점점 하얘지는 우리 세대의 미래를 위한 맥주를 준비하는 것이 맞는가. 트렌드가 아닌 시장을 보면 난, 후자라고 생각한다."


나도 뉴그레이라고 지칭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면서, MZ에 눈이 팔려 내가 일 할 때 당장 신경 쓰지 않았고, 내 유튜브 알고리즘에 뜨지 않는다고 잊고 있었다.


40대를 뉴그레이의 시작으로 보는 것이 맞는가. 

MZ의 어르신으로 보는 것이 맞는가. 


정답은 없다. 생각하기 나름이다. 

그런데 뉴그레이에 더 끌리는 이유는 당연한 이야기에서 생소함을 느껴서 일 것이다.




12p: 젊은 시절의 물리적 결핍을 해결하고 재건하려 애써 살아왔던 시니어는 시니어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다른 욕망을 꿈꾸게 된 것이다.


32p: 누구에게나 그렇듯 삶은 현재진행형이다. 시니어라고 해서 과거형으로 살지 않는다. 시니어도 도전하고 성장하며, 모험을 떠나고 새로움을 추구한다. 그들 인생에서 끝난 것은 아무것도 없다.


115p: 누구나 버킷 리스트가 있지만, 언젠가 한 번쯤 꼭 해보고 싶다는 꿈의 목록이 시니어에게는 남다른 무게감으로 다가온다. 그 언젠가가 바로 지금이기 때문이다.


187p: 지금 시니어는 처음 만나는 100세 시대의 첫 번째 시니어다. 그들이 가는 길이 향후 X세대, MZ세대, 그리고 알파 세대가 갈 길이므로, 그들의 노년은 반드시 행복해야 한다.


312p: 노년의 목표는 젊음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젊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이다.


341p: 시대를 이해하고, 세대를 이해하고, 그리고 개인을 보라. 시대와 세대를 읽는 목적은 개인을 이해하기 위함이지, 세대를 가르고 한정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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