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2019)
심상
'감각에 의하여 획득한 현상이 마음속에서 재생된 것'
좀 더 착 붙는 단어로 하면 '이미지'다.
영화판에 활기를 넣어줬던 이 영화가 나온지도 3년이 지났다. 피앙세와 처음 함께 본 영화라 이전에도 기록하려고 창을 열었다 나오기를 반복하고 독서모임에 이 영화를 가져가 발제를 하기도 했는데,
2022년의 연말까지 와서야 다시 창을 띄워본다.
먼저 <기생충>이 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혹은 인정받는 이유, 그리고 영화의 상황과 인물들에 얼마나 공감이 가는 지를 물었었다.
이 영화의 발단점인 부잣집에 슬쩍 들어간다는 점을 두고, '누구나 한 번쯤' 이런 상상 해보지 않았나?라고 서두를 꺼내려다가 흠칫 멈췄다. 누구나라는 말이 어느 집단에서는 그다지 와닿지 않을 것 같아서 말이다. 이런 영화였다. 바로 옆 가까이에서 말을 나누고 있는 사람과 나를 진정 '우리'라는 묶음에 넣을 수 있을까 하는 문득의 불안감과 불쾌감을 풍겼다. 누군가에게는 다큐가, 누군가에게는 판타지가 되기에 감각적으로 우리라는 관념을 슬쩍 갈라놓을 수 있었다.
이야기를 나눴던 사람들 개중에는 겪어본 아랫 세계 삶, 관찰한 아랫 세계의 삶을 의기양양하게 드러내는 사람도 있었고, '어머' 하며 '나는 그런 것과 거리가 먼 삶이라 모르겠네요, 근데 너무 별로네요.'식의 얼굴을 하는 사람도 있었으며 조용히 의견을 마음에만 두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대다수가 이 영화가 인정받는 것에 동의했다. 디테일이 엄청나고 몰입도가 높다는 이유였다. 다만 나는 그 부분에는 동의가 어려웠는데, '봉테일'적 특성에 매몰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개연성, 떡밥 회수, 유머는 물론 구멍 없는 배우들의 연기는 빠져나갈 곳이 없게 극의 짜임새를 공고히 했다. 하지만 영화를 보며 기대하는 그 이상의 무엇을 느낄 수 없어 스스로를 다그쳤다. 내가 뭔데 봉준호에게 그 이상이 없어! 하며 말이다. 그렇다, 이번에는 봉준호가 예술가가 아닌 기술자로 느껴져서 그랬다.
충
요샛말에 '충'이 들어가는 단어가 많다. 비하와 조롱, 하대가 유머로 잘 포장이 되어 우리 사회에 공기처럼 깔려있다. 그런데 그 단어를 가만 들여다보면 벌레가 나오고, <기생충> 속 가족들을 보고 있노라면 바퀴벌레가 떠오른다. 어둠이 집을 감싸 주인들이 활동하지 않는 시간을 틈타 나와서 제 것인양 활보하고 물건과 공간을 향유한다. 그들은 어두울 때 갑자기 나타난 게 아니다. 쭉 있었다. 마치 그 집이 제 것인양.
만약 우리가 갑자기 불을 켰을 때 바퀴벌레의 꽁무니라도 보면 어떨까. 그리고 만약 그들의 사체라도 보게 된다면 그 많은 다리들과 가닥가닥의 다리에 달린 털을 보고는 소름이 돋을 것이다. 더러운 존재로 느껴지고 얼른 그 대상과 분리되고 싶어질 수도 있다. '선을 넘는다'는 말은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엄밀한 상이성, 엄격한 분리성을 만드는 '선'이 있음을 전제한다.
이게 혐오다.
싫어하고 미워하는 마음. 박사장은 냄새로 사람을 판단하고 결과에 따라서는 혐오한다. 바로 그 혐오는 영화 속에서 자신을 찌르는 칼로 다가온다. 누군가를 혐오하는 힘은 상당히 강해서 어떤 일의 동인이 되기에 충분하다.
영화는 가난을 혐오의 이미지로 소비하는 착한데 어딘가 모르게 순수하고 띨한 부자들의 모습을 흘긋 흘긋 흘려낸다.
습기와 후각적 심상
습기는 상태를 전달하는 효과적인 수단이다. 피부의 건강한 생기는 수분으로 표현되고 빨래의 오류는 꿉꿉함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때로 시각으로는 숨길 수 있지만 후각으로는 전해지는 인간의 숨길 수 없는 '상태'는 박사장의 '혐오'를 통해 기택의 수치심을 자극한다.
영화가 '계급'을 표현하며 사용한 습기 후각적 요소에는 지하철 냄새, 빨래 냄새, 집 냄새 그리고 비가 있다. 그중에 가장 세게 표현된 것이 폭우였다.
누군가에게는 착잡했던 마음을 씻어주는 시원한 비인 것이 누군가에게는 변기에서 똥물이 넘치고 하수도에서 물이 역류해와서 한 등을 누일 자리를 앗아가고 병균이 퍼지게 하는 악마가 된다. 적당한 습기는 가습의 역할로 촉촉함을 주지만 넘치는 습기는 인간의 자리를 앗는다.
습기가 전하는 후각의 심상은 우리가 눈으로는 애써 숨기는 것들까지 바깥으로 뒤집어 나오게 한다. 비슷한 예가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작은 아씨들>에서 오인주의 대사에 보인다.
"겨울에는 가난을 숨길 수가 없어요. 다른 계절에는 어찌어찌 남들만치 입겠는데 겨울 코트는 너무 비싸거든."
정말 숨기고 싶고 들키면 비참해지는 것이 있다. 그런데 애초에 그걸 숨기는 방패는 너무 무르고, 방패를 찌르는 칼은 너무도 강하고 날카롭기 때문에 유리나 마찬가지다. 현대의 계급은 발가벗겨놓으면 다 똑같은 사람들에게 무른 방패를 얻게 하느냐, 강한 방패를 얻게 하느냐에서 갈린다. 물론 방패는 돈이고 창은 사회다.
모사, 극의 이유
부자인데도 착해, 부자니까 착한 거야.
극 속의 이 대사를 두고 문제를 풀려고 고민했다. 사람들에게 생각을 묻기도 했다. 마땅한 답은 없었고 본인의 생각과 경험이 얼버무려진 생각 뭉텅이가 커질 뿐이었다.
그런데 이걸 생각해보니 너무 웃긴 거다. 나는 부자도 아니고 부자로 살아본 적도 없는데, 그리고 내가 삼성을 일굴 것 같지도 않은데 왜 이렇게 부자들, 나아가서는 재벌들의 삶을 보고 있을까. 어차피 그 인과관계는 내가 겪어본 것도 아니고 일반화하기도 어려운 개인의 생각이다. 나는 절대 알 수가 없다.
왜 이렇게 티브이에 <재벌집 막내아들>, <작은 아씨들> 등 등 부자들이 한가운데에 나오는 드라마가 밟히며 영화도 그럴까.
나는 그 사람들이 아닌데, 그들이 궁금해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인간은 모방을 통해 학습하는 이상적인 존재다. 모방하며 모사와 원본을 비교하며 공통점과 차이점을 찾는 '비교'를 하게 되고 그 학습 과정을 통해 즐거움을 느낀다. 이 모방을 예술적으로 한 것이 '극'이다. 예술은 현실을 모방한 일상에서의 '보편자' 역할을 한다. 극 중에서도 백미는 '비극'이다. <오이디푸스>에서 주인공이 겪는 고통과 슬픔 그리고 고난을 보며 감상자는 공포와 연민을 느낀다. 좀 더 쪼개어 보면, 공포에서 연민으로 넘어오는 바로 그 타이밍을 인간이 비극을 보는 이유인 '쾌'의 순간으로 볼 수 있다. 증오, 혐오, 분노, 공포의 고통을 등장인물에 이입하여 느끼다가 그것으로부터 해방될 때, 꽉 눌려있던 감정이 해방되고 그것을 기쁨으로 본 것이다.
그럼 재벌을 모방하지 왜 가난을 항상 그 대척점에 세워두고 소비할까.
나는 그것이 비극의 서사 및 구조와 비슷하다 생각한다. 사실은 재벌이나 돈이 보고 싶은 게 아니다. 그 대척에 있는 가난의 비극을 보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일종의 쾌를 느끼고 싶은 것이다.
우리는 좋은 작품에서 부자가 주인공인 걸 찾기 어려울 것이다. 언제나 가난이 주인공일 것이다. 그럼
이 작품의 주인공은 누굴까?
한 자라도 기록은 해야지 했던 <기생충>에 대한 몇 글자는 여기서 마친다.
+ 이 영화의 마무리가 판타지처럼 된 것은 아쉬운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