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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랑자 Apr 26. 2020

도쿄의 민간 행정가, 모리빌딩

장소를 만든다는 것

롯폰기 힐즈


나는 장소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장소를 만드는 여러 일 중에서도 건축설계를 하고 있다.

건축학과를 다니고 실무를 하면서 많은 건물들의 멋들어진 준공 사진을 봤고, 답사를 다녔다. 아무리 공들여 지어졌어도 사람이 들어와 지내지 않으면 금세 먼지가 쌓이고 녹슬어버린다. 반면, 외진 지역의 그리 훌륭하지 않은 수준의 공간이라도 누군가 공들여 운영하는 곳은 사람들에게 기억된다. 이렇게 뽈뽈뽈 다니며 보다 보니, 자본의 규모라던지, 입지라던지, 디자인의 수준을 차치하고,, 물리적인 '공간'을 '장소'로 만드는 무언가가 있는 듯하다. 앞으로 적게 될 시리즈에서는 2년 차인 내 눈으로 바라본 장소에 대한 비즈니스를 스스로 한번 톺아 보고,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보려 한다.



부동산 시장

부동산 시장은 크게 두 방향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건물을 짓는 것(1)과 지은 것을 운영하는 것(2).

1) 건물 짓기

건물은 누가 만드는 걸까? 건물을 짓는 자를 시행자라고 한다. 시행자는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건축주, 발주처, 시행사, 물주(?), 디벨로퍼 등등. 이 글에선 디벨로퍼라 불러보겠다. 현금이 많은 사람은 부담 없이 자기 원하는 걸 지을 수 있겠지만, 많은 디벨로퍼들은 은행으로부터 대규모 대출을 받아야 한다. 은행은 디벨로퍼가 지으려는 건물의 수익모델을 보고 위험을 측정한 뒤 대출 여부와 이율을 계산하기 때문에(Project Financing PF), 디벨로퍼는 부도나지 않으려면 확실한 수익구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분양 혹은 매각이다. 분양을 할 때에 가장 확실하고 빠르게 현금을 손에 쥘 수 있기 때문이다. 매각의 경우는 건물 전체를 파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 확실한 방법이 된다. 대책 없이 건물을 오래 가지고 있으면 마이너스가 되기 십상이기에, 디벨로퍼에게는 짓고 빨리 털어버리는 게 속이 편하다.


2) 건물 운영하기

디벨로퍼 주도로 지은 모든 건물은 건물주가 있다. 기업/개인의 소유 거나, 혹은 건물주를 전문으로 하는 '자산운용사'라는 집단 소유일 수 있다. (이 글에선 동산의 자산운용이 아닌, 부동산의 자산운용을 의미한다.) 자산운용사는 시행사가 지은 건물들을 매입해 운영하고,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기간 동안 건물 가치를 증대시켜 매입가보다 높은 매각가로 수익을 만드는 사람들이다. 이들 역시 건물을 매입할 때 은행의 대출을 받고, 펀드를 통해 투자자를 모집한다. 은행에게는 원금과 대출 이자를, 투자자들에게는 증권과 배당금을 지급한다. 그렇게 대출과 펀드의 만기가 도래하는 시기에 맞추어 사업의 사이클이 돌아간다.

중요한 것은 건물의 공실률이 운영기간 동안 낮을수록 건물 가치가 올라간다는 것이다. 고로 자산운용사는 공실률 관리에 많은 힘을 쏟는다. 오히려 임차인들을 붙들기 위해 1년에 몇 달은 임대료를 받지 않는 Rent-free를(집 월세에 Rent-free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거나, 철거비용을 감면해 준다던지 하는 방식이다. 또 자산운용사가 고용하는 Property Management, Leasing Management, Facility Management (PM, LM, FM)라는 파생된 건물 관리 비즈니스가 있어, 건물 가치 유지/상승의 핵심적 역할을 한다. (엄청나게 커다랗고 사람이 많은 건물주씨와, 엄청나게 조직적인 관리인씨라고 볼 수 있겠다.)


건물의 생애주기, Building Life Cycle


여러 가지 대책이 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건물이 '어쩔 수 없이 있는 곳'이 아닌, '여기를 원해서'가 되는 것이 임차인이 떠나지 않는 것의 기본이지 않나 싶다. 건물 사이클에 관계된 모든 사람이 '어떻게 하면 여기 더 머물고 싶게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지만, 서로의 존재조차 모르는 경우도 많다. 나 또한 '건물 운영? 그거 그냥 하면 되는 거 아닌가?'라고 생각했었지만, 역시 알고 보니 더 깊은 세계가 있다. 내 수준에서 여기까지 이해하기까지 많이 찾아봐야 했고, 업계의 여러 사람들과 대화도 나눠 보게 되었다.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 '사람들이 여기 더 머물렀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서로 관점은 다르지만, 관계자 모두의 고민일진대, 어떻게.. 묶어 생각할 수는 없을까? 건물의 라이프 사이클 그림을 살펴보면, 이렇게 뒤죽박죽 이해관계가 다른 사람들이 어쩌면 하나로 엮일 수 있겠단 생각도 든다. 생각해보면 디벨로퍼는 건물 사업의 선봉에 선 사람인데, 이 사람이 진즉 진두지휘했으면 되는 거 아닌가?

일반적인 사람들 입장에서 디벨로퍼는 아직까지도 '업자'로 많이 인식되고 있다. 아직까지 부동산을 단순 수익 수단으로 여겨온 사회이기 때문이지 않나 싶다. 하지만 최근의 동향을 보면 누가 보아도 포화된 서울 부동산은 양보다 질을 필요로 한다. 공간의 질, 머물고 싶은 공간, 장소 만들기.. 이것을 두고 개발-기획 업계에서는 Place Making이라 부른다. 이는 이제 막 선진국 반열에 오른 우리 입장에서 당연히 마주하게 될 수순이었고, 옆 나라 일본에서는 이미 20년 전부터 시행업자들이 디벨로퍼로 변모해 세련된 도쿄를 만드는 데 앞장서고 있었다.



Mori Building

내가 가장 눈여겨보는 기업은 '모리빌딩 Mori Building Company'이다. 모리빌딩은 미나토구를 중심으로 개발을 진행하는데, 자신의 지역구를 중점적으로 개발해 궁극적으로 자신이 가진 자산들의 가치가 상호 상승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모리 이외의 주요 디벨로퍼들도 마찬가지다. 주오구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미쓰이, 마루노우치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미츠비시지쇼가 있다.


모리빌딩과 운용자산 지도_Mori Hills REIT Investment Corp.


모리빌딩은 쌀 도매상이었던 모리 다이키치로(1904~1993)가 태평양 전쟁 후 토지를 사들여 개발을 하면서 시작되었다. 시작은 다른 부동산 회사와 다를 바 없는 분양 방식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사세를 확장하던 중, 일본 버블 경제의 정점이었던 1970~80년대에 이르러 모리는 복합개발에 눈을 뜨게 되었다. 모리가 생각한 배후 수요는 :

(1) 위성도시에서 출퇴근하는 사람이 늘며 도시 공간이 비효율적으로 이용되고 있었고

(2) 이제 부자가 된 전후세대 일본인들이 라이프스타일에 눈을 뜨기 시작했으며 (이 내용은 Culture Convenience Club, 츠타야 편 참고)

(3) 서방의 압력에 의해 시장이 개방됨에 따라, 외국 금융기관과 다국적 기업이 대거 도쿄 진출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1980년대 모리는 주거/업무/문화/상업의 복합개발로 도심 안의 도시를, Compact City를 만드는 전략을 취했다. 벤치마킹 모델은 르 코르뷔지에의 '수직 도시(Vertical City)'였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아크 힐즈(1986), 롯폰기 힐즈(2003)이다. 이들은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찾는 복합시설이다. 이때 모리가 취한 방향은 현재까지도 도심 개발의 표준으로 작용하고 있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흔히 아는 이야기다. (** 디테일은 '전종현의 인사이트'에 잘 정리되어 있다.)


잠시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생각해보면 우리나라에 있는 복합 상업시설은 모두 유통업체가 개발하고 운영하고 있다. 롯데몰, 신세계 스타필드.. 등등. 원래도 쇼핑 사업을 하던 그들이 복합개발사업을 하는 게 당연해 보이기는 하는데... 한편, 내가 아는 일본 유명 쇼핑몰은 긴자 식스, 오모테산도힐즈, 비너스포트.. 그런 거다. 관광객인 내가 알 정도로 인지도 있는 그 쇼핑몰들은 대부분 모리의 작품이다. 이상하다. 아파트나 오피스를 주로 만들 줄로만 알았던 모리빌딩이 상업시설 강자라니. 오피스/아파트는 상업시설과 결이 완전히 달라 그 둘 모두에 전문인 회사는 드문 것으로 알고 있었다. 모리는 어떻게 부동산업계에서 이런 전방위적인 수준을 갖게 된 걸까? (** 한국에 롯폰기 힐즈가 없는 이유_박희윤 HDC 참조)


롯폰기 힐즈 개발 전/후_Roppongihills.com


Roppongi Hills

롯폰기 힐즈는 완공되기까지 17년이 걸린 프로젝트다. 400명이 넘는 권리자와 이해관계를 조율하고 자발적 동의를 이끌어내는데 그 시간을 투자한 것; 원주민들이 같은 땅에 100% 이주할 수 있도록 하고, 그렇지 못한 원주민에게는 배당금을 지불하는 방식으로 이끌었다. 17년의 시간 동안 원주민과 조율해 조합을 설립하는 과정에서 거리 정비, 도로 신설 등에 따른 비용을 모리가 부담했다. 그러한 공공기여의 인센티브로 기준보다 2.2배의 용적률을 적용받게 된 것. 시간을 투자해 공공에 기여한 대가는 어마어마했다. 아마도 모리는 이 과정에서 섬세하게 공공과 조율하는 것에 인사이트가 트인 것이 아닌가 싶다. 모리의 타운 매니지먼트 부서는 이때 신설되어 복합단지의 브랜딩, 운영 및 룰 확립, 임차인 관리, 커뮤니케이션, 이벤트, 홍보, 마케팅, 커뮤니티와 함께 롯폰기 힐즈의 수익관리를 하고 있다. 건물 사이클에 관계된 대부분의 업종을 개발회사 하나가 소유하고 컨트롤하는 상황이다. (**공간은 도시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모리빌딩 _From A)



힐즈라이프 매거진, 모리미술관, 아카데미힐즈


실제로 롯폰기 힐즈 꼭대기의 모리 미술관은 도쿄에서 손꼽히는 미술관으로, 모리미술관의 전시는 항상 화제가 된다. 그래서 나도 도쿄를 가면 항상 찾곤 한다. 이 미술관은 르 코르뷔지에가 생전에 남긴 예술작품을 루브르 다음으로 많이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미루어보건대 모리의 '수직도시' 철학은 그냥 나온 게 아니라 열렬한 팬심으로 비롯된 것이리라(르 코르뷔지에에 대한).. 또 내가 가보지는 않았지만 모리미술관과 같이 타워 고층부에 아카데미 힐즈가 있다. 아카데미 힐즈는 직장인들의 아지트인데, 라이브러리와 코워킹 스페이스가 있고, 때때로 연사를 초청해 렉처를 하기도 하는 활발한 장소라고 한다. 브런치에 가끔 그곳의 방문기를 올리는 사람들이 있는 걸 보면, 꽤나 인지도 높은 곳일 것 같다. 게다가 부동산 회사가 잡지라니, 모리는 Hills Life라는 라이프스타일 잡지를 2004년부터 발행하고 있다. 격월로 발행되는 이 잡지는 이번 달 100호를 발간했다. 이 잡지에서는 모리의 롯폰기 힐즈/오모테산도힐즈/긴자 식스/아크 힐즈/토라노몬 힐즈에서 벌어지는 여러 이벤트를 간접적으로 소개하기도 한다. (코로나 여파로, 이번 판은 pdf로 무료 발행한 듯하다. 죄다 일본어인 게 함정이지만 pdf 모으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은 클릭해보면 좋을 듯.) 이 정도 모리를 파악하고 나니, 어떤 철학이 없었다면 이런 규모로 이렇게 수준 있는 콘텐츠를 20년 넘게 운영하고 축적할 수는 없었겠다 싶었다. 



1980년대에 모리가 콤팩트 시티를 만들어 성공했다면, 2020년대에도 성공적으로 사업하는 데에 있어 모리는 어떤 배후 필요를 읽은 걸까? 나는 다음과 같이 추측해 본다.

(1) 저성장/저금리에 따른 현금 유동성 확보 : 분양이나 매각보다는, 임대와 리츠를 통해

(2) 꾸준한 임대 수입을 위한 펀더멘털 강화 :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R&D, 그리고 운영 노하우

모리가 성공하는 부동산을 기획한 힘은 결국 라이프스타일에 있다고 생각한다. 1980년대 산업사회에서 정보사회로 넘어오면서 변화하는 라이프스타일을 캐치해 복합개발에 성공하고, 2020년이 오기까지 꾸준히 건물을 운영하며 라이프스타일의 변화를 트래킹하고 또 이끌어왔다. 그렇게 개발이라는 하드웨어에서 시작해, 사업기반을 소프트웨어로 발전시킨 회사라고 생각한다.

부동산에 있어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차이는 동대문 평화시장과 일반 백화점을 비교하면 알 수 있다. 평화시장은 방생이다. 관리되지 않은 장소다. 반면 백화점은 쾌적한 쇼핑을 위한 관리/운영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모리빌딩은 자산관리, 임대, 라이프스타일 잡지, 미술관, 이벤트/행사 모두 모리 그룹 안에서 운영하고 있으니,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실험과 업데이트를 즉각 즉각 할 수 있는 유연한 구조가 아닌가 싶다. 이렇게 보면 모리는 도쿄도 모리 구(미나토구)의 구청장급 행정가가 아닌가 싶을 정도다.


원점으로 돌아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의미 있는 장소가 되어주는 건 어떤 곳일까. 자주 찾는 곳일지라도 어쩔 수 없이 가는 곳이 있고, 좋은 경험을 위해 찾는 곳이 있다. 나아가 당장 화제가 되는 곳을 만들 수는 있어도 그곳을 가꾸고 유지해나가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일일 듯하다. 나는 사람들에게 의미를 만들어 주는 곳이 장소라고 생각한다(인스타그램 핫플레이스가 아니라). 공간이 장소가 되는 힘은, 모리빌딩에서 보이듯, 운영에 있다. 운영의 중심은 역시 사람이다. 결국 라이프스타일인 것이다. 지난번에 다뤘던 CCC 츠타야와도 맥이 닿아 있다.

위 기업들이 지난번 터닝포인트인 산업사회에서 정보사회로의 전환점을 캐치했다면, 현재의 라이프스타일 변화는 무엇이 견인하는 걸까? (코로나 바이러스가 어떤 대! 전환점이 되어줄 것 같다.) 아직은 머릿속이 모호하지만, 관심 가는 여러 회사들을 뜯어보면서 내 나름의 탐구를 계속해 볼 생각이다.



+P.S


Mori Hills Investment Corp. 2020년 1월 보고서


Mori Hills Investment Corp. 2020년 4월 26일 주가

자신들이 일본 리츠를 선두하고 있고, 배당금도 19년 연속 증액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코로나는 이런 상황에서 어떤 결과를 가져다줄까? 주거라면 몰라도, 상업과 오피스 수익률에는 큰 타격이 있지 않을까 싶은데.. 그다음 분기 리포트가 궁금해진다.



- 참고자료 -

1) [매경이 만난 사람] 낡은 도쿄 도심 대혁신한 모리 히로오 모리빌딩 부사장

2) [버블 붕괴 '後' 20년, 일본] 도시재생 성공모델 '롯폰기힐스'를 가다

3) Hills Life Magazine

4) 국토연구원 세계도시정보_롯폰기 힐즈 도심 재개발

5) 전종현의 인사이트_모리 부동산이 만들어나가는 도쿄의 모습

6) FromA_공간은 도시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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