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호텔이 유독 좋다. 예쁘게 꾸며진 넓은 리조트도. 그 테마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순간, 다른 세상에 사는 반 쯤은 다른 나를 마주한다. 예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건축, 인테리어. 발 디디는 곳 마다 더럽혀 진 적 없는 것 처럼 깔끔히 청소 되어 있고, 흘러 나오는지도 몰랐던 나직한 음악 소리는 마치 내 머릿 속에서 재생되는 마음의 노래처럼 자연스럽다. 그 안의 모든 사람들은 여유가 넘치고 사랑으로 가득 차 나를 공격할리 없는 안전함도 느껴진다. 이 모든 좋은 것을 더해 낸 하나의 느낌. 그런 곳에 들어서면 한 군데 한 군데 모든 공간의 공기가 모두 이 '하나의 느낌'으로 가득 차 있는 듯 하다. 그 곳에서의 나는 비교적 참 얌전하고 친절하고 안정되어 있다.
엊그제, 산책을 나섰다. 날이 맑아 끈적임 없이 걷다가 태양이 햇빛을 비춰 내게 보라고 눈길 준 곳에 가 시선을 멈췄다. 찰나의 느낌이 나를 스쳤다. 늘 그렇듯 느낌 후에 인지는 뒤 늦게 한다. 그 느낌, 호텔에서 느끼던 그 '느낌'이다. 내 시선이 머무른 곳은 새로 짓고 있는 완공을 거의 앞둔 아파트 단지, 그 곳에 예쁘게 지어진 입구 건축물이었다. 이미 찰나에 스치고 자취를 감춘 그 느낌에 미련이 남아, 나는 멈춰 서 아파트 단지를 빼꼼 구경했다.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는 아파트 단지였지만, 조금이나마 더 새 것이라 최신의 것에서 나는 세련됨이 있었다. 특히 입구 디자인이 그랬다. 왜 인지 그 입구를 통과해 들어갈 수만 있다면 누구에게나 있지 않을 평화가 나에게만은 특권처럼 쏟아질 것 같은 환영하는 모양의 건축물. 나는 그 평화의 정체가 궁금해져 몸을 서 있던 곳에 그대로 멈춰 세워 둔 채 웅장한 입구를 통과해 신식 아파트 단지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나는 어릴 적 가지고 놀던 인형의 저택 안에 들어 있다. 플라스틱으로 지어진 인형의 저택. 베개정도 만한 넓이. 작은 플라스틱 인형은 바닥에 발이 붙은 채 내가 조종하는 스틱에 의해 정해진 길을 따라 움직인다. 대문을 열고 들어 와 펼쳐지는 2층 짜리 대 저택. 대 저택이 분명하지만, 방은 두 어 개 정도. 부엌이 있고, 1층엔 커다란 홀이. 신데렐라 동화 속 주인공이 구두 한 쪽을 버려두고 떠났던 계단처럼 넓고 웅장한 계단을 오를 생각에 나는 1층은 구경할 새가 없다. 왼 쪽 계단을 오르면 있던 내가 가장 좋아하던 방. 그 방엔 예쁜 드레스가 가득 할 옷 장이 벽면을 채우고, 공주가 눕는 하얀 시트의 침대도 있다. 그저 스틱을 움직여 인형이 이 방 저 방 옮겨 다니는 것 밖에 할 것 없는 장난감이었지만, 그 때 그 인형들이 그 작은 공간에서 정해진 길만을 따라 한정 있이 이리 갔다 다시 돌아왔다 해대는 동안, 얼마나 많은 상상들을 했었는지. 그 순간 진짜 그 인형이 되어 디즈니 공주가 되어보기도 하고 과거 속에 실제 있었을 귀족 아씨가 되어보기도 하고 평범한 우리집의 막내 딸이 그 대저택을 가져보기도 하고. 이 방은 내 방 저 방은 동생 방, 있지도 않은 여자 형제들을 만들어 방을 나눠 내 방엔 더 크게 정을 줘 보기도 하고. 내일이면 누가 이 집에 놀러와 뭐를 하고 같이 놀까 계획을 짜기도 했다.
지금은 미처 다 기억해 낼 수 없는 그 상상들. 그때의 마음들. 그럼에도 그때 그 곳에 있었다고 꼭 확신 할 수 있는 건 나를 다시 그때의 그 인형의 집으로 데려다 준 그 '느낌.' 어떤 단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기분 좋은 느낌, 하지만 그때는 기분 좋을 것도 없이 당연했던 내가 누리고 있을 미래의 느낌. 아름답고, 고급스럽고, 평화만이 가득할 것 같은 그런 장소에 가면 아주 짧게 회상되어 올라오는 그때의 느낌. 호텔에서. 신식 아파트 단지의 입구에서. 그저 콘크리트일 뿐이고 그저 돈 잡아먹는 사치일 뿐이고 나 말고도 수 만 혹은 수 십 만 명이 단 하루 누리고 가는 환상일 뿐이고 일하기 싫은 영혼들이 지루히 앉아 창조해 낸 고액 연봉의 결과물일 뿐임을 알면서도 나는 그 매력적인 느낌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그 느낌을 반짝 느끼고, 애처롭게 붙잡으려 하면서도 나는 그것의 정체가 밝혀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내 뇌에서 이런 저런 대화가 오가는 사이에 나는 따로 나 있지 않은 출구를 통해 그 신식 아파트 단지 안을 빠져 나온다.
소유욕. 물질주의. 허세. 공주 놀이. 현실감각을 잃은 몽상. 이 모든 것들을 자아내는 결핍. 사람들의 눈에 비친 아이의 순수함은 이런 나의 본성을 포장해 줄 수 있을까? 아니면 꾸며진 호텔의 화려함과 고급스러움에 자발적으로 속는 허세 가득한 여자가 그 어린 아이의 순수함마저 더럽혀 버리려나. 나는 그런 종류의 모든 것들을 어린 기억에만 존재하는 인형의 저택 속 웅장한 계단 위에 벗어 두고 왔어야 했을까? 대저택은 평화로웠다. 아이는 늘 사랑받고 있었다. 그것이 부모로부터 였는지 한 남자로부터였는지 그건 몰라도, 부족할 것 하나 없이 사랑받는 모자름 없는 여자였다. 나는 자꾸 존재하지 않아 상상 속에 만들어 낸 미래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그 본성이 자꾸만 세상의 미움을 받아 빼꼼 고개만 내밀곤 이내 숨어버리긴 하지만. ‘나도 갖고 싶어.’ ‘내가 주인공이야.’ ‘더 많이 사랑받고 싶어.’ 소곤대는 작은 소리를 듣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