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아파스주는 전체 땅의 약 3분의 2 정도가 숲과 정글로 이뤄져 있다. 이는 멕시코 32개 주에서 가장 높은 수치로, 그만큼 생물다양성이 풍부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치아파스 지도를 자세히 보면 과테말라 국경 근처에 있는 땅 대부분이 정글임을 알 수 있다. 팔렌케 (Palenque)는 이런 치아파스주 정글 한가운데 위치한 도시중 하나로, '정글의 도시' 답게 날씨가 덥고 습한 특징을 갖고 있다. 특히 3월부터 5월까지는 최고 기온이 35도를 넘나들 만큼 덥다.
산 크리스토발에서 약 다섯 시간 떨어져 있는 팔렌케는 인구 13만 명이 사는 제법 큰 도시다. 도시 입구에는 마야 원주민 동상이 세워져 있으며, 그곳을 지나 10분 정도 걸어가면 팔렌케 중심 공원에 도착한다. 마을 분위기는 대체로 한산한 편이다. 공원 가운데에는 뾰족한 두 탑 사이로 둥그런 아치 모양을 산토 도밍고 데 구즈만 성당 (Parroquia de Santo Domingo de Guzmán)이 있고, 주변엔 사람들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카페와 음식점들이 들어서 있다.
팔렌케는 2015년 마법의 마을로 선정됐다. 이곳이 마법의 마을로 선정된 이유는 사실상 단 하나이지 않을까 싶은데, 바로 잘 보존된 유적지 때문이다. 마야인들이 남긴 이 유적지의 이름은 도시 이름과 같은 팔렌케다. 과거 마야 사람들은 도시를 바캅, 혹은 오툴룬이라 불렀다. 하지만 1567년 도미니코회 성직자였던 페드로 로렌조 (Pedro Lorenzo)가 이곳에 오면서 팔렌케란 도시를 세웠고, 고대 유적지도 똑같이 팔렌케란 이름이 붙여지게 됐다.
마야 팔렌케는 스페인 사람들이 세운 팔렌케에서 차로 약 15분 정도 떨어져 있다. 치첸잇자, 툴룸과 같이 하나의 도시 국가였던 팔렌케의 역사는 약 250년부터 시작됐고, 약 700년 경 자취를 감췄다. 이후 오랜 시간을 정글 속에 감춰졌다 20세기가 돼서야 세상에 알려지게 됐는데, 이때 고고학자 알베르토 루즈 륄리에 (Alberto Ruz Lhuillier)의 노력이 컸다. 그는 발굴 작업을 통해 팔렌케의 수수께끼를 풀어냈고, 도시의 역사를 상세히 기록해 세상에 알렸다.
팔렌케의 역사가 다른 마야 도시 국가에 비해 잘 알려져 있는 건 상형 문자 때문이었다. 여기서 상형문자는 그림 비슷한 문자로, 이집트의 고대 문자와도 결이 비슷하다. 팔렌케의 문자들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잘 보존된 편이었으며, 고고학자들이 해석을 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이 때문에 첫 왕이었던 쿡 바흘람 1세 (K'uk' Bahlam I)에서부터 전성기를 이끈 파칼과 바흘람 2세, 그리고 마지막 왕 바흘람 3세까지 총 19명의 팔렌케 왕조 계보가 세상에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팔렌케의 모든 것이 100% 파헤쳐진 건 아니다. 유적지 한 편에선 여전히 발굴 작업이 진행되고 있으며, 고고학자들은 지금까지 알려진 역사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유적지에 입장하면 나무 사이로 큰 피라미드가 눈앞에 보인다. 바로 이것이 팔렌케를 대표하는 비문 피라미드 (Pyramid of Inscriptions)다. 피라미드에 이런 이름이 붙여진 건 총 620개의 문자가 적혀 있는 비문을 이 피라미드에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과거 팔렌케 사람들은 문자를 새김으로써 마야의 신들과 신화 이야기를 전달하고, 종교적 신념을 전파하고 보존하길 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정치적으로는 종종 도시의 지배자들의 업적을 찬양하며, 그들의 신성한 통치 권한을 강화했다. 즉 지배자의 권력, 그리고 신과의 연결을 묘사한 문자를 피라미드에 새긴 것이었다.
비문 피라미드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팔렌케의 가장 위대한 왕 파칼의 관이 묻혀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무덤이 발견 됐을 때, 관은 온갖 보물과 함께 옥으로 만들어진 가면으로 덮여 있었다. 참고로 옥은 마야인들에게 부와 지위를 상징한 것으로, 위대한 왕으로써의 파칼의 지위와 부를 나타냈다. 또 피라미드는 9개 층으로 지었는데, 이는 마야의 지하세계인 시발바 (Xibalba) 층 수를 상징한다. 현재 피라미드에 올라서면 과거 그의 관이 발견된 곳을 둘러볼 수 있다.
파칼이 위대한 인물로 꼽힌 이유는 '난세의 영웅'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재임하기 이전 팔렌케는 이웃 국가 칼락물 (Calakmul)에게 자주 공격을 받는 힘없는 도시 국가였다. 하지만 615년 그가 재임한 이후 팔렌케는 군사, 경제적으로 강해졌고, 특유의 리더십으로 다른 도시 국가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파칼의 덕분에 전성기 시절 팔렌케엔 만 명 정도가 거주하는 도시로 발전했으며, 교역의 중심지 카카오, 도자기, 옥으로 된 상품을 거래하며 주요 교역지 역할을 하기도 했다.
파칼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아들 바흘람 2세가 왕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훌륭한 왕이었으며, 팔렌케를 안정적으로 통치해 많은 존경을 받았다. 임기 기간 동안 그가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부분은 도시의 강력함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는데, 특히 십자가 신전과 태양의 신전을 건설하며 팔렌케의 위대함을 과시했다. 현재 이 신전들은 비문 피라미드를 지나쳐 조금 걷다 보면 볼 수 있으며, 특히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 십자가 신전 위에서는 팔렌케의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팔렌케의 역사를 살펴볼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8번 신전 (Templo 8)이다. 1994년 처음 8번 신전을 발굴했을 때, 그곳에서 적색 황화수은 (Cinnabar)으로 덮인 한 여성의 붉은색 무덤이 발견됐다. 주변에 갇힌 묻힌 보물들 때문에 한눈에 봐도 높은 지위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이 무덤은 훗날 고고학자들에 의해 바칼의 아내이자 바흘람 2세의 어머니 Tz’akbu Ajaw로 밝혀졌다. 이러한 이유로 신전은 붉은 여왕의 신전(Templo de la Reina Roja)이란 또 다른 이름이 붙여졌으며, 그녀의 복원된 무덤에서 나온 옥 가면은 팔렌케의 찬란한 역사를 나타내는 상징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