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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IGE Apr 03. 2020

서유미 [홀딩, 턴]

한국소설

언니가 예식장에 흐르던 음악에 대해 말했다.
- 그때 우리도 일찍 와 있었잖아. 그런데 30분 내내 「사랑의 인사」가 흘러나오는 거야. 아, 결혼생활이 이렇다는 거구나. 제일 좋아하는 시디를 한 장 고른 다음 평생 들어야 하는 거구나. 그렇게 생각하니까 이해가 쉽더라고. 단순한 음악이 아니라 메타포였던 거야.
(서유미 한국소설, 홀딩,턴 , e-book 16p)


뜨뜻미지근한 하루가 지겨워 넷플릭스를 뒤적거리다 드라마를 꺼내 든다. 허기짐을 채우려고 보게 된 드라마들 치고 막상 마지막회까지 본 드라마는 거의 없다. 터무니 없는 삼각관계에 지레 질려 드라마를 보다 말고, 만날 수 없는 재벌과 서민의 사랑은 기가차 볼 수 없었다. 너무 잘생기고 예쁜 배우들은 드라마를 보면서는 저런 얼굴로 사는 것은 어떤 것일까 생각하면서 보느라 이입이 잘 되지 않았다.


삶은 생각보다 단순한데 드라마는 특수한 상황으로 매 회마다 나를 피곤하게 만들었다. 아니, 드라마가 더 이상 내 시간을 오래 잡아두지 못했던 것은 삼각관계나 복잡한 인물 설정이 아니라 내가 이미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의 뒷장을 펼쳐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귀엽고 사랑스러운 드라마의 한 장면보다 활자로 쓰여진 결혼 5년 차의 지원과 영진이 테이블에 앉아 헤어짐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이 더 오래 남았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마치 내가 오래도록 알고 있었던 이야기처럼 서유미 작가의 《홀딩, 턴》은 내 기억 속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오곤 했다.


살다 보니 누군가 치명적인 잘못을 저질러서 신뢰가 깨지고 그 때문에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던지고 부수고 머리끄덩이를 잡고 서로 죽일 듯이 싸워야만 헤어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같은 집에 살면서도 대화는커녕 눈도 마주치치 않고 서로의 뒷모습을 보며 적의가 담긴 눈길을 쏘아대는 순간 헤어짐이 시작되는 것이다.
(서유미 한국소설, 홀딩,턴 , e-book 222p)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를 찍으면 남이 된다는 노랫말처럼 부부도 선택적 아니 자발적 관계기 때문에 굵은 실로 맺어있는 듯 하지만 실상 아주 가는 실로 엮여있다. 연애때는 그 줄이 또렷해서 한쪽이 세게 당기면 끊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같이 살다보면 그 얇은 줄에 갖가지 것들이 걸려, 줄이 보이지 않으니 당기는 세기를 각자 조절 하지 못한다.


그 팽팽해진 줄 위에 서있는 그들이 있다. 몇 번의 타이밍으로 연결 된 만남을 지나 사랑을 하고 그 과정에서 결혼을 했고 이제는 헤어짐, 이혼 앞에 서 있는 지원과 영진. 극적인 요소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감정과 과정이 고스란히 내게 전해졌다. 《홀딩, 턴》은 끈에 걸려있는 것들을 걷어내고 부부의 관계를 홀딩 할 것인지, 턴해서 각자 다른 삶을 찾아 들어갈 것인지에 대한 과정이 그려져 있다.


어른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아직도 모르겠지만,

《홀딩, 턴》을 읽으면서 어른의 과정 혹은 어른이 되는 단계란 이런 것이 아닐까 싶었다.


날이 선 말을 주고받는 동안에는 감각이 무뎌지지만 화해하고 난 뒤에는 상대가 했던 말이 남긴 상처 때문에 욱신거렸다. 그 말과 함께 이혼 얘기를 꺼낸 건 어떤 의미일까. 지원과 영진 모두 자신의 말끝에 묻은 독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상대가 뱉은 말에서 나온 독이 자신의 상처 위에 번져나가는 것만 아파했다.
(서유미 한국소설, 홀딩,턴 , e-book 30p)


알랭 드 보통의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은 연애 이후의 결혼 생활이 너무 날 것이라 별로 공감이 되지 않았는데 서유미의 《홀딩, 턴》은 인물의 감정에 집중을 해서 그런지 연애 이후의 결혼 생활에 대한 균열이 훨씬 잘 다가왔다.


결코 가벼운 책은 아니지만 어렵지 않게 잘 읽히는 소설이다. 결혼 3년 차 이상이라면 많은 부분 공감하며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오늘은 무슨 책을 읽을지 고민이라면 서유미의 《홀딩, 턴》을 꺼내 들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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