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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IGE Apr 28. 2020

정세랑 [목소리를 드릴게요]

한국소설

특유의 문체와 예상치 못한 글로 정세랑 작가 책은, 요즘 같이 정신이 산란할 때 꺼내 들기가 참 좋다. 그래서 별생각 없이 ㅡ신간이 나왔길래 전자도서관에 희망도서로 신청하고 읽었다. 데뷔 10주년을 맞아 2010년부터 2019년까지 작가가 쓴 SF 단편 모음집이었다는 것도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고나서 알았다. 정세랑은 SF 작가였구나…! 장르소설인지 몰랐네.


더운 바람이 끼치는 어떤 날, 이야기 주머니가 큰 친구와 편의점에 마주 앉아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자신이 꾼 꿈 이야기라며 가볍게 풀어 놓은 것만 같아서 장르소설이라는 경계없이 읽어냈다. 단편에는 약한 편이라 총 8편의 이야기들을 한데 모아 요약하고 담을 수는 없지만 뭔가 이 책을 읽고 정세랑 작가와 한층 더 가까워진 느낌이 든다. 10년동안 그녀의 주제는 또렷했구나, 이 기분 나쁜 풍요속에서 그녀는 얼마나 많이 앓아야 했을까. 멋지다고 생각했고 곧이어 마음이 쓰였다.


생각해보면, 지렁이들이 내려오기 전에 끝나지 않은 게 신기하다. 우리는 행성의 모든 자원을 고갈시키고 무책임한 쓰레기만 끝없이 만들고 있었다. 100억에 가까워진 인구가 과잉생산 과잉소비에 몸을 맡겼으니, 멸망은 어차피 멀지 않았었다. 모든 결정은 거대 자본에 방만히 맡긴 채 1년에 한 번씩 스마트폰을 바꾸고, 15분 동안 식사를 하기 위해 4백 년이 지나도 썩지 않을 플라스틱 용기들을 쓰고, 매년 5천 마리의 오랑우탄을 죽여 가며 팜유로 가짜 초콜릿과 라면을 만들었다. 재활용은 자기기만이었다. 쓰레기를 나눠서 쌓았을 뿐, 실제 재활용률은 형편없었다. 그런 문명에 미래가 있었다면 그게 더 이상했을 것이다.

정세랑 한국소설, 목소리를 드릴게요  「리셋」,  e-book 49 (17%)



코로나19가 발생하고 해변을 비롯 많은 관광지가 봉쇄되자 멸종된 거북이가 세상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고 인도에서 스모그로 보이지 않던 히말라야 산맥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스크 쓰고 직장 동료와 타노스가 실은 지구의 영웅이라는 말을 내뱉고, 지구에게 인간이 결국 바이러스 같은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를 한다. 정세랑 작가의 말 중에 ‘23세기 사람들이 21세기 사람들을 역겨워할까 봐 두렵다’는 글이 있다. 나는 그 문장을 곱씹으며 정말 그렇게 되면 어쩌지 같이 두려워졌다.


코에 플라스틱 빨대를 꽂은 거북이를 보면서 글은 쉽게 옮겨 담으며 막상 플라스틱 빨대가 없는 카페에 가면 불편하다고 볼멘 소리를 한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환경도 가십처럼 생각하고 아주 잠깐 의식했다 금방 꺼버린다. 그런 내게 지렁이들이 오래도록 남아있다. 일회용품을 사용하고 있는 순간에 찾아와 입김을 불고 봄이니 새 옷을 사고 싶은 찰나에 지렁이가 머리 깊숙이 훑고 지나간다. 옷을 보다 멈추고 제로 웨이스트를 검색했다. 내게 이 책은 경각심 그 이상이었다.


완벽한 풍경이었다. 하루를 더 살아남는다 해도. 그 풍경을 그대로 간직하기 위해 다시는 내다보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그런 완결성이 사람에겐 필요한 것이다. 운동선수에게 메달이 필요하듯이.

정세랑 한국소설, 목소리를 드릴게요  「리셋」,  e-book 241 (88%)


인간은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고 지구에게 해가 되지 않고 살아가려면 결국 종말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나는, 여러 단편들 사이에서도  「리셋」 이 오래도록 남는다.


정세랑 작가는 문장의 마침표를 파스텔 톤으로 칠하는 능력을 지닌 것 같다. 읽고 나면 드라마가 아니라 동화(동심(童心)을 바탕으로 지은 이야기. 또는 그런 문예 작품) 같다. 꾸밈이 없어서 그런가. 내게 《목소리를 드릴게요》는 생각이 줄을 잇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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