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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IGE Oct 23. 2020

매일 변명거리를 만들며, 산다

무소속 페이지 (not-empty paige)

실은 도망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구한 거였다. 돈을 벌고 있는 사람에게는 질문이 없지만 돈을 벌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질문이 많기 때문에, 혹여 쉬는 동안 무얼 했냐 물으면 뭐라도 말을 해야만 할 것 같아서, 아무도 묻지 않는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 변명거리를 만들어냈다.


                                                                                    
9월은 하는 것 없이 바쁘다 라는 말을 달고 살았던 것 같다. 느지막이 9시에 일어나서 강아지를 침대 머리맡에서 뒹굴거리며 바라본다. 같이 숨 쉬고 있는데 시간의 속도가 다르다는 것이 야속하다. 강아지와 함께하면서 시간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된다. 넌 어떤지 모르겠지만 내 욕심으로는, 네 시간도 나처럼 더뎠으면 좋겠다 싶은.

해가 깊게 들어오면 세탁기를 돌리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난다. 세탁기를 돌리고 청소기를 들고 방구석을 살핀다. 유튜브로 요가를 틀고 30여 분간 온몸을 풀어준다. 빨랫감을 옥상에 널고 내려오면 오전이 간다. 루틴 한 내 아침이다. 세탁기를 돌리지 않는 날이어도 할 청소는 많다. 화장실을 치운다거나, 바닥을 걸레로 닦는다거나. 집은 하루만 치우지 않으면 티를 낸다. 그동안 얼마나 눈을 감고 살았던 것인지.

점심은 간단하게 먹고 광합성 듬뿍 받기 위해 강아지랑 30분 이상 산책을 한다. 집에 와 씻고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다 보면 금방 해가 진다. 근처 시장에서 장을 봐서 저녁을 짓고 컴퓨터를 조금 하다 보면 7시가 훌쩍 넘는다. 외부 일정이라도 있는 날이면 루틴 한 하루는 다음날로 미뤄지고 그날은 또 바쁘게 돌아간다. 정말 하는 일 없이 날들이 갔다.

                                                                                    

12개월을 쉬겠다고 마음먹고, 딱히 정한 것은 아니지만 비슷한 하루들을 보내며 1개월이 지났을 때 슬슬 초조함이 일었다. 아무도 묻지 않는 질문이, 자려고 침대만 누우면 머릿속을 덮쳤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1년이 지나가버리면 어쩌지. 나는 왜 일을 그만두려고 했던 거지. 내가 하려던 것은 무엇이었지. 하루가 내 손을 벗어날 때마다 나는, 자꾸 내 하루의 의미를 찾으려 애썼다.


캐나다 때와 달랐다. 캐나다에 있을 때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날들에도 의미를 담아 용케도 버틴 시간이라며 내 용기이자 경험으로 감쌌지만, 나고자란 여기서는 그렇게 나를 보호할 것들을 쉽게 찾을 수 없었다. 해야겠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날들은 오히려 더 무기력해졌다. 도망쳐야겠다 생각했다.



그래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평일 4시간씩 월 90만 원 남짓. 운 좋게 재택이 가능해서 대체로 집에서 일을 한다. 루틴 한 오전이 가면 일을 시작하는데 이 짧은 시간이 생각보다 내 오후를 많이 잡아먹는다. 돈이 뭐라고, 그래도 내 하루를 환산할 적은 금액에 조금은 위로가 된다. 이 돈 때문에 얼마나 숱한 날을 술로 지새웠던가. 그런데 돈이 뭐라고, 위로가 되다니 침을 뱉고 싶어 지네.


12월이면 끝날 아르바이트. 장작을 모아 겨울준비를 하듯, 지금부터라도 변명이 될 소일거리들을 차곡차곡 모아 놓아야겠다. 누군가 내게 날이 설 질문을 하면 주춤하지 않고 날이 선 대답을 던질 요량으로 작은 변명들을 무기처럼 다듬으면서 살아내야지. 소속되지 않고 이 삶을 살아내야지, 살아내는 법을 찾아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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