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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수골방 Feb 15. 2017

<너의 이름은>이 가진 미숙함들에 대하여


신카이 마코토 감독에게 서사 구성력이 약하다는 비판이 가해지곤 하는 것은, 대개 그 판단 기준이 전통적인 서사의 문법 위에 놓여져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전통적인 서사는 한 인물이 세계와 관계를 맺어가며 경험하는 사건들을 묘사합니다. 흔히 그것을 갈등이라고 하죠. 주체인 나와 세계 사이의 필연적인 이질성으로 인해 마찰이 생기고, 주체는 그 마찰력을 극복하기 위해 힘겨워하게 되는 그 갈등.


그런데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보여주는 서사는, (그의 작품 속 주인공들이 항상 독백을 내뱉는 것처럼) 인물 스스로의 고정된 내면 세계를 세밀하게 묘사하는 것에만 그쳐왔습니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 전체와 관계 맺으려하기 보다는, 일상이라는 자신의 주변 세계와만 관계를 맺으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카이 마코토 작품에서의 갈등은 새로운 관계를 맺음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관계가 유지되지 못함에서 발생합니다. 그가 맞서 싸우고자 하는 세계는 새로운 미지의 것이 아니라, 한 때는 내것이었으나 지금은 내것이 아니게 되어버린 세계(세카이)입니다. 확장되지 않는 '내것'.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독백처럼, 그가 상대하고자 하는 세계도 그렇게 인물의 내면과 같은 조그마한 범위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가 인물들의 일상을 아름답게 묘사하는 힘은 분명 지금까지 그 누구도 쉽사리 획득하지 못했던 그만의 독보적인 강점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강점은 동시에, 그의 시선이 일상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반증해주는 약점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호소다 마모루와 함께 꽤나 오래동안 포스트 미야자키라고 불려왔지만, 미야자키를 뛰어넘는 작품 세계를 가지지 못하는 것으로 평가받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미야자키의 인물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세계와 관계 맺으려하면서 인식의 확장을 꿰하는 반면, 신카이의 인물들은 기존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을 우선적으로 두려워하며 더 넓은 세계로의 시선두기를 보류하고 있기 때문이죠.


주체가 세계와 관계를 맺어가면서 얻는 그 무수한 감정들을 독창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예술이라고 한다면, 신카이 마코토가 관계맺고자 하는 세계는 그렇게 근본적으로 비좁기 때문에 그가 성취할 수 있는 예술의 범위도 당연히 제한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술의 진정한 가치는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확장시켜줌에 있습니다. 강렬한 예술적 체험은 우리가 관성적으로 유지해왔던 세계에 대한 인식을 파괴해서, 새롭고 넓은 방향으로 전환시켜줍니다. 예술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명제가 성립가능한 이유이고, 예술이 위대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인식의 지평을 넓혀줄 수 없는 예술이라면 위대하다는 평가까지 받지는 못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그의 이번 신작 <너의 이름은.>에 대해 엇갈린 평가가 나오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합니다. 그가 관계맺고자 하는 세계가 (작품 활동 15년 만에)드디어 확장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이제야 자신만의 세계를 벗어나 모든 이들의 공통적 세계로 나아갔기에 그 첫 걸음걸이가 조금은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스타일을 유지하면서도 세계관을 확장시키려하는 성장에 대한 칭찬과 전통적 서사를 다루는 것에 아직 익숙하지 못함에 대한 평가가 공존하고 있는 것이죠.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영화를 내놓고, 그에 대한 소설을 내놓는 것으로 영화에 대한 보충적 설명을 한번 더 내놓는 방식을 유지해왔습니다. 혹자는 그만큼 2시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다 담지 못할 방대한 내용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건 더 거대한 서사를 2시간 안에 충분히 담아내는 타 작품들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생각해봤을 때 신카이 마코토가 아직 서사를 다룸에 있어 뛰어나지 않다는 사실을 반증해줄 뿐입니다.


<너의 이름은.>은 작품 전개의 상당 부분을 우연적 요소에 기대고 있습니다. 일단 미츠하와 타키가 꿈에서 만나는 것부터 우연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수십 세대 동안 이어져내려온 한 가문의 제례 의식, 천년 만에 반복되려 하는 혜성의 충돌,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나는 '황혼'의 시간. 작품은 그러한 우연의 연속에 일본 전통 문화와 종교적 신비함을 덧입혀서 필연으로 도치시키려하고 있습니다. 그 수많은 것들을 전부 다 '무스비'라고 말하는 할머니의 말처럼 말이죠.


영화를 볼 때 우리의 의식은 줄곧 머물러있던 내면 세계를 떠나 잠시 영화 속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그래서 영화는 관객들이 이 세계가 '가짜'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할만큼의 촘촘한 세계를 구성해야 합니다. "저 정도면 정말 있을법한 이야기다"라는 '느낌'을 줘야하는 것이죠. 그 느낌을 만드는 것이 바로 서사입니다. 인물이 세계와 싸워나가는 과정의 인과가 현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그래서 저 인물의 투쟁이 마치 나의 투쟁처럼 느껴지도록 해주는 것. 그것이 제대로 구현됐을 때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무너지고 나와 인물 사이의 거리도 함께 무너집니다. 예술 감상에 있어서의 '물아일체'의 경지가 구현되는 것이죠. 이걸 가능하게 해주는 서사의 힘은, 언젠가 VR기술이 오감을 완벽하게 압도하는 매트릭스의 수준으로 발전해서 그러한 물아일체의 느낌을 뉴런에 직접 때려박기 전까지 분명 유효할 것입니다. 물론 저는 그 이후에도 유효할 것이라 생각하지만요.


어쨌든 위에서도 말한 것처럼 <너의 이름은.>은 너무나도 많은 우연적 요소에 의지하고 있어서 서사의 연결고리가 느슨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느슨한 서사의 틈이 있을 때, 관객들의 의식은 그 사이로 자꾸만 탈출하게 됩니다. 작품 속의 인물들은 울고불면서 눈물을 짜내는데, 관객들은 무표정이거나 심지어 냉소하기까지 하는 그 익숙한 광경들이 연출되는건 전적으로 서사의 완결성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너의 이름은.>이 (저를 포함)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닿을 수 있었을까요? 그건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오래동안 써왔던 반칙, 음악 덕분입니다.


거의 사기 수준인 작화 위에, 말랑말랑한 음악을 입혀놓으면 일단 서사는 둘째치고 우리의 시청각이 먼저 마비되는 수순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서사가 느슨해지고 관객들의 긴장도 느슨해지는 적재적소에 한번씩 그런 장면들을 넣어주면, 그 '약기운'이 한동안 지속되어서 현실 세계로 돌아가려던 관객들의 의식이 다시 스크린 속으로 스며드는 것이죠.


그렇게 신카이 마코토는 오래동안 갈고 닦아왔던 자신의 그 강점으로, 서사에서 드러나는 단점을 어느 정도 보완했습니다. 하지만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튼튼하지 않은 토대가 계속된다면 균열은 또 생길텐데, 그 균열의 틈만 메우는 미봉책을 계속 사용할 수도 없을테니까요. 전통적 서사의 형식을 띄었던 <별을 쫓는 아이>의 실패는 분명 또 다시 반복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다음을 응원합니다. 첫 걸음마가 서투르면 잘 걸을 수 있도록 보조해주는 것도 필요하지만, 드디어 더 넓은 세계를 보고자 두 발로 일어선 그 용기를 칭찬해서 스스로 계속 나아가게 하는 편이 더 효과적일테니까요.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여타의 인터뷰에서 밝혔듯, 이번 <너의 이름은.>의 제작 계기는 동일본 대지진입니다. 그는 지금까지 일상이라는 주제에 천착해왔는데, 누군가의 일상이 한순간에 종말을 맞이한 순간을 목도해버린 것입니다.


"도쿄도 언젠가는 사라질지도 모른다"라는 타키의 극 중 대사. 거기에는 신카이 마코토 자신이 느꼈던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과 책임감, 그리고 자신이 천착해왔던 일상의 영역이 언제든 날아가버릴 수도 있겠다라는 위기의식이 투영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의 시선은 언제든 종말을 맞이할 수 있는 나만의 세카이가 아니라, 내가 종말을 맞이하더라도 누군가는 계속 이어나갈 우리 모두의 보편적인 세계로 향하고 있습니다.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에서 남자 주인공 타쿠야는 여자 주인공 사유리를 구하려 합니다. "사유리 하나를 구하려는 네 욕심 때문에 세계가 멸망해도 좋으냐"는 친구의 질타에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사유리를 구하는 것이 결국 세계를 구하는 것이었다- 라는 세카이계 특유의 해피엔딩으로 흘러가긴 하지만, 세계를 인식함에 있어 '구름의 저편'과 '너의 이름은.'에는 분명한 차이가 생긴 것으로 보입니다.


저는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작품을 좋아합니다. 사실 보편적, 전통적 서사에서의 그러한 결여를 내포한 채로라도 저는 촉촉 감성 가득한 그의 작품을 좋아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아름다운 색채로 가득한 그의 세계가, 미야자키의 세계까지 품어낼 수만 있다면 그 때야말로 진정 '사기캐'가 되기 때문에 가능하다면 그쪽으로의 성장을 응원하고 싶은 것입니다.


<너의 이름은.>에서 제가 가장 감동받았던 부분은 타키와 황혼에서 만난 이후의 미츠하가 마을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뛰고, 구르는 장면이었습니다. 이제 그가 구하고자 하는 것은 '나만의 세카이'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세계'로 전환된 것으로 보입니다.


"너와 나를 구해야 이 세카이가 유지된다"와 같은 각자 도생의 서사에서 "이 세계를 구해야 너와 내가 거기서 계속 살아갈 수 있다"와 같은 연대의 서사로 그는 나아가고 있는 것이죠.


영화는 그냥 영화로 봐야지, 왜 자꾸 현실이랑 연결시켜보아야 하나라는 의문을 가지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글의 초반에서도 말했듯, 제가 바라보는 예술이란 "주체가 세계와 관계를 맺어가며 느끼는 무수한 감정들을 독창적으로 표현해놓은 것"이자, "세계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혀주는 것"입니다.


예술이 발생하는 원인도 세계이고, 지향해야할 방향도 결국 세계인 것이죠. 라이트노벨이니 세카이계니 하는, 실제 세계의 현실과 괴리된 컨텐츠들이 일본에 많아지기 시작하면서 일본 사회의 폐쇄성이 더 짙어진 것도, 예술과 현실의 연관성을 반증해주는게 아닐까요. '와따시노 세카이'를 외치는 작품들이 주류를 이루는 사회와 '우리의 세계'를 외치는 작품들이 주류를 이루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분명 다를 것입니다.


신카이 마코토가 채색하는 아름다운 세계가 우리 모두의 것으로 확장된다면, 한 때는 찬사였다가 이제는 족쇄가 된 '포스트 미야자키'의 칭호도 벗어던질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침 2020년에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진짜' 은퇴작이 발표됩니다. 신카이 마코토도 3년 뒤의 신작을 예고했으니 개봉 시기가 맞물릴 수도 있겠죠. 욕심이겠지만, 어쨌든 세대 교체의 유력한 가능성을 지닌건 호소다 마모루 감독과 신카이 마코토 감독 둘 뿐이니 저의 원활한 취미생활을 위해서라도 힘내줬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여러 논란이 많았던만큼 미완의 모습을 보여줬던 신카이 마코토의 세계. 그러나 저는 그가 드디어 알을 깨고 더 넓은 [진짜]세계를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그의 앞길을 응원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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