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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agarden Oct 09. 2021

당장 화해해야 하는 남자, 며칠이 필요한 여자

결혼하고 며칠 후 부부싸움을 했다


화해는 오늘이어야 하는 남자와 오늘은 아니어야 하는 여자 결혼을 했다. 우리 부부는 싸움도 화해도 방법이 달랐다.


신혼 시절, 남편은 대학원생이었고 나는 5년 차 직장인이었다. 신혼 초기 상대적으로 시간을 유연하게 쓸 수 있었던 남편은 아침에 분주히 집을 나서는 나에게 간단한 아침 과일을 싸 주기도, 가끔은 저녁을 만들어놓고 기다리기도 했다. 나는 그런 남편이 보고 싶어서 일이 끝나자마자 광화문역으로 뛰어가고는 했다.


결혼한 지 며칠 되지 않은 날. 나와 남편은 명동에서 만나 간단한 먹거리를 사들고 함께 집들어갔다. 버스에 올라탄 우리는 2인 자리에 함께 앉았다. 그 좌석이 얼마나 달고 편한. 하이힐을 운동화 신 듯 신고 100미터 달리기도 가능하던 때였으나 그날은 꽤 피곤한 날이었다.


남편은 그런 걸 몰랐겠지. 다리가 아프다, 피곤하다 말하지 않았으므로. 그리고 몇 정거장을 지났는데 굳이 자리 양보가 필요 없어 보이는 한 초등학생과 저씨가 차에 올라탔다. 남편은 자동 반사처럼 일어나 아이에게 자리를 양보다. 


도 모르게 남편을 따라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대롱거리는 손잡이를 쥐어 잡고 30분여를 서서 왔다. 발도 정말 아프고 편히 올 수 있는 자리를 비자발적으로 양보한 것에 짜증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더군다나 그날은 결혼 후 맞은 첫 번째 내 생이었다. 오늘 생일인데 바쁘고 피곤해서 좋은 곳에 가서 저녁 식사도 못했는데 이게 뭐람. 하는 생각이 올라왔.


저 표정이 그 날 내 표정이다


집에 온 우리는 간단히 저녁을 먹었다. 화가 나있는 내가 보였는지 남편도 기분이 좀 가라앉았다. 그러던 중 남편이 화장실을 가는데 불 스위치를 탁! 하고 치며 들어갔다.


'저 남자 지금 화났구나. 느껴졌다. 화난 게 누군데?! 저런 식으로 화를 내는 거야!'


이 모든 것은 입 밖이 아닌 머릿속에서 일어났다. 가 났다고 단정지은 것도 나였고 짜증이 난 이유를 설명하지 않은 것도 나였다. 그러면서도 남편은 신도 아닌데 내가 말하지 않는 마음까지 딱딱 알아서 나를 생각해주고 배려해주기를 바랐다. 그가 무심하다고 생각되자 미운 마음이 올라왔다. 그리고 그냥 무서웠다. 그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까, 연애할 때  몰랐던 폭력성 같은 게 나올지도 모르잖아라는 생각까지.


침실에 들어와 자려고 불을 끄고 누웠다.



따라오는 남편. 이내 불을 켠다.


경아야, 이야기 좀 하자.


아무 말없이 불을 다시 끈다.


경아야, 일어나 봐. 왜 그러는데, 뭐 때문에 화가 난 건데?


오빠, 나 아무 말도 안 하고 싶고 많이 피곤하니까 잘게.


이야기해 봐. 그래야 내가 알 수 있지.


난 시간이 필요한데..




연애 시절이다. 삼청동, 금요일 퇴근 후 만났다.


오빠, 뭐 먹을까? / 아무거나.


그럼 저기 갈까.


사람이 많다. 다시 나와 조금 걸었다.


저기 어때?


고깃집이었다. 그래 하고 들어가서 자리에 앉았는데, 여긴 뭐가 별로란다.


그럼 나갈까? / 응 다른 데로 가자.


짜증이 올라온다. '다 괜찮다더니 뭐야.. ' 나는 점점 말수가 줄었다. 한 이탈리아 레스토랑에 가서 식사를 마치고 나왔는데도 기분이 별로다. 아무 말없이 안국역 방향으로 걸었다. 그는 당황했다. "왜 그러는데..." '아, 아무 말도 하기 싫다'는 생각뿐이다. 설득에 못 이겨 카페로 들어가 차와 케이크를 주문했.


말해봐. 그래야 알지.




갈등이나 문제에 대해 해결책을 알고 있음에도 본능의 힘에 사로잡혀 그게 잘 되지 않을 때가 있다. '내가 지금 속상한데 이유는..' 하고 말을 하는 법을 몰랐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나는 내가 느끼는 감정도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기분이 좋거나 나쁘거나의 어느 지점에서 표현할 뿐이었지, 당황스럽다, 슬프다, 애처롭다,  속상하다, 걱정된다, 의심스럽다, 우려된다 등의 감정을 인지하지도 못하고 감정이 그렇게 흘러가게 된 이유는 생각해본 적 없었다.


그냥 당황스럽거나 화가 나면 혼자 시간이 필요했다. 문제를 직시했다기보다 혼자 삭이거나 잊는 방식으로 넘겼다.


"말해야 알지"라는 말은 의미심장한 이야기였다. 오해는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지레짐작하고 그 생각을 뒷받침할 한 가지 현상만 더 추가되면 확신에 이르게 된다. 대화 없는 관계는 점점 이상한 곳으로 간다.


우리 부부는 결혼을 해서 참 다른 서로를 인정하고 맞춘다고 저런 모습으로 꽤 싸운듯하다. 큰 소리 내는 법은  없었지만 갈등을 푸는 방식은 너무나도 다른 것에 많이 놀라면서...




그날 다시,


방에서 자려는 나와 이야기하려는 남편은 대립했다.



아니, 이 사람 정말 당황스럽네?!
아무 말하기 싫다는 사람에게 지금 뭐 하자는 거지?


어이가 없었다. 


오빠, 난 시간이 필요해!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진단 말이야.


그래도 말을 하자. 난 이 상태로 못 자겠어. 분명 네가 화가 난 시점이 있을 텐데, 혹시 나 때문에 그런 거라면 알려줘야 같은 일이 생기지 않지.


이 상황이 당황스러워 입을 꾹 닫고 있는 나를 계속 설득했다.


맞다, 나는 당황스러웠다. 당황한 이유는 첫째, 나는 이 사람과 정말 다르구나. 화가 났는데 어떻게 말을 하라는 거지? 난 자야 되는데? 둘째, 입 밖으로 지금 내 감정을 설명하는 것이 습관이 안되어 있는데 계속해보라니까. 다가 나는 내 좋지 않은 감정을 이야기하는 것이 부끄러운데? 그런 일로 시시콜콜 다 이야기하는 것이 귀찮기도 했다.  그냥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지는데? 계속 말해보라고 추궁? 당하니 '이거 그냥 별 일 아닌데 넘어가 주면 안 되나.'라는 생각마저 올라온다. 사실 별 일인데도 말이다. 셋째, 말하다가 더 큰 싸움으로 번지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가 되기도 했다. 혹시 돌변하는 사람은 아닐까 걱정도 됐다.


그 당시에는 이런 이유들 때문에 당황했다는 것조차 몰랐지만 지금은 알겠다. 알게 됐다. 정말 사소하고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은 일에서 내가 감정이 상해버리는 사람이란 걸. 그게 잘 고쳐지지 않는다는 걸. 설거지를 시작할 때 남편이 내가 할까 묻는 말에 아니 내가 할게 하고 흔쾌히 이야기를 한 후에도 설거지를 하는 도중에 마음이 변하기도 하는 사람이란 걸.


내 마음은 이런 줄 알았다. 실상은 반대였다.





우리는 변했다?!



결혼 후 그와 살면서 많은 것을 주고받았다. 우리싸움이나 갈등이 오래가지 않는다. 부정적인 감정이 올라오면 바로 표현하기보다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 나를 조금은 객관화해 그것을 파악해보려 한다. 정리되면 이내 그것을 설명한다. 이런 일들이 쌓이다 보니 상대방의 취약점이 무엇인지, 어느 지점에서 서로 조심해줘야 하는지 알게 됐다. '이 선은 지켜줘야 하지'라는 게 생겼다.


작은 배려들이 쌓이면 관계는 더 돈독해진다. 신뢰를 바탕으로 한 안정감은 삶을 풍성하게 하는 밑천이 된다. 관계에서 풀지 않은 숙제가 없다 보니 마음이라는 공간이 가벼워지고 중요한 일에 집중할 수 있는 에너지도 생겼다.


가끔씩 흐르는 세월을 절감할 만큼 남편의 낯선 모습을 포착할 때가 있다. '저 배 나온 사람은 누구며 왜 안경을 벗고 찡그린 채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지?' 하는 순간들 말이다. 존경의 마음보다 걱정이나 우려의 마음이 들 때도 있고 '살수록 정이 떨어진다더니..'라는 생각이 엄습해 놀랄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유머로 승화시키거나 기도한다. 이 좋지 않은 마음이 저 사람에게 전달되기 전에 사라지게 해 달라고.


결혼 13년 차 삶의 굽이친 길을 함께 걸으며 관계가 두터워지는 인생 베프가 됐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데 우리는 조금씩 날 것 그대로의 스스로를 다듬어가며 살아간다. 이젠 표정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 가끔 어떤 상황에서 떠오른 말들이 같아 소름 돋을 때도 있다. 소울메이트다. 그의 상실은 나의 상실이고 그의 아픔은 나의 아픔이다. 그가 웃으면 나도 웃고 그가 울면 내 콧등도 시큰해진다. 요즘 야근도 부쩍 많아지고 미래에 대한 우려로 표정이 별로일 때가 있다. 그 마음을 잘 돌봐야겠다.



부쩍 바빠진 남편, 힘내!





* 사진 출처: gettyimag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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