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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아결 Mar 13. 2022

낯선 동네에 정이 들고 있다.

단골 가게 만들어보기

살던 동네를 떠나 낯선 곳으로 이사 온 지 2년이 지났다. 이 동네는 지리적으로 주거 지역과 상업 지역의 경계에 있다. 그래서인지 아침과 저녁으로는 단정하게 갖춰 입고 출퇴근하는 직장인들이 보이고, 퇴근 시간을 아예 넘겨버린 밤이나 주말에는 수면 바지에 슬리퍼를 끌고 다니는 '동네 사람'들도 보인다. 직장도 집도 아닌듯한 이 오묘한 길거리의 풍경에 아직도 내 집인 양 이 동네에 마음을 붙이진 못하고 있다. 


그렇지만 나 홀로 살아가는 듯이 동떨어진듯한 이 동네에서도 이웃의 정을 느끼는 순간이 있다. 동네에 익숙한 얼굴들이 생겨나고, 도움이 필요할 때 도움을 요청해볼 만한 사람이 있음을 느낄 때다. 그래서 오늘은 이 동네에서 자주 들르며 알아간 인연들을 기록해본다. 


가장 먼저 이웃이 된 사람은 공인 중개사 분이었다. 보일러가 고장 났을 때라든지, 싱크대나 좌변기 레버가 고장 났을 때라든지 내가 애타는 순간에 부를 수 있는 분은 공인 중개사 분의 연락처였다. 요청이 잦아질수록 별로 반가운 내색은 사라지셨지만, 그래도 늘 위급할 때 해결책을 찾아주신 분이다. 특히 지난 2021년 1월의 영하 20도에 육박하던 겨울에는 빠르게 보일러를 고쳐주셔서 덕분에 겨울을 따뜻하게 날 수 있었다.


말 한마디에 나 혼자서 내적으로 이웃을 삼아버린 분도 있다. 집 바로 옆 편의점 운영진(?)분들이다. 그곳에는 디즈니 애니메이션 <뮬란>의 황제와 닮은 인자한 얼굴의 점주님이 있고, 점주님의 따님으로 보이는 직원 분과 어떤 관계인지는 모르겠지만 삼촌 뻘 되어 보이는 직원 분이 있다. 퇴근길이나 운동 후 집에 가는 길에 들러서 나를 위한 소소한 보상을 하고자 과자나 주전부리를 사곤 한다. 갈 때마다 그분들이 계시면 괜히 든든하다. 비슷한 시간 대에 자주 뵈니 내적 친밀감도 생겼다. 결정적으로 정을 느낀 날이 있었다. 

하루는 평소처럼 과자와 음료수 등등을 골라 계산하고 있는데, "비닐봉지에 담아드릴까요? 분리수거 버릴 때 비닐봉지 많으면 좋으니까요~" 하고 말을 건네주셨다. 이 동네는 분리수거함이 따로 없고 비닐에 담아 집 앞에 두면 되는 곳이라 그 말 한마디에 담긴 배려가 크게 다가왔다. 그래서 그날부터 나 혼자 이웃으로 삼아버렸다.


자주 가는 동네 책방의 직원 분은 통성명까지 하고 인스타 계정과 연락처도 나눈 사이이다. 그곳은 우리 동네에 이런 서점이 있다는 자체가 고마울 정도로 맘에 쏙 드는 인테리어와 책 큐레이팅과 소품들이 가득한 공간이다. 동네에 이사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이 서점에서 사브리나 코헨-해턴의 <소방관의 선택>과 오스왈드 챔버스의 <주님은 나의 최고봉(한영 합본)>이라는 묵상집을 샀던 적이 있다. 

그때 내가 고른 책을 보시고 교회 얘기가 나와서 얘기를 나누다가 같은 교회 성도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시에는 교회가 워낙 크고 나도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지 않을 때라 그냥 신기한 인연이라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서점에 자주 오가고, 갈 때마다 간식도 주시고 나도 나눌 음식을 들고 가기도 하면서 얼굴이 익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오래 알고 지낸 사이가 아니지만 개인 사정으로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기도도 부탁할 만큼 내적 친밀감이 쌓였다. 

어제 오랜만에 그 서점에 들렀다. 혹시 안 계시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감사하게도 마감 시간에 가까운 그때에도 그 직원 분이 계셨다. 오랜만에 왔다고 인사를 드리니 날 알아보시고 눈물이 고인 눈으로 진심으로 반갑게 맞아주셨다. 기도 부탁했던 일에 대해서도 기도하면서 기다렸다고 하셨다. 그래서 그 간의 사정들을 말씀드리며 주스를 나눠 마셨다. 퇴사하는 친구의 선물을 사러 갔던 차라 선물 포장도 예쁘게 해 주시고 선물이라며 귀한 신앙 서적도 한 권 선물해주셨다. 

낯선 동네에서 도움을 받고, 한마디 말속의 배려를 보고, 진심으로 삶을 나누는 이웃들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에 신기하고 감사하다. 하나님이 이 낯선 동네도 사람과 사람이 사는 곳이라는 것을 알려주시려고 돕는 어른들을 보내주셨다. 보통 사는 곳보다는 사람이 모이는 곳에서 활동하다 보니 동네의 단골 가게는 잘 만들지 않았다. 어쩌면 단골 가게가 생기면 이 동네에 더 정이 들지 않을까 싶다. 내일은 동네 한 바퀴를 돌면서 자주 들를만한 곳이 있을지 탐색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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