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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연 Oct 19. 2017

놀란의 우주에서 찾는 인간성

크리스토퍼 놀란의 「인터스텔라(Interstellar)」, 2014

2016.05.03 예술비평연구회 발제문



  2014년 개봉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인터스텔라」는 전 세계에서, 특히 한국에서 크게 흥행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특히 개봉 초기에 많은 이의 눈길을 끌었던 것은 우주를 잇는 웜홀과 시간의 중첩, 다른 우주에 존재하는 행성들의 모습, 그리고 다년간의 연구 끝에 가장 실제에 가까울 것으로 생각되는 형상으로 구현한 블랙홀이 그려내는 놀란의 우주공간이었다. 여기에 한스 짐머의 음악이 더해지니 영상의 웅장함은 가히 압도적이다. 

  그러나 영화에 과학적 오류가 많다는 논란은 차치하고서라도, 스토리면에서 「인터스텔라」는 너무나 과학적인 이야기를 너무나 비과학적으로 풀어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무려 공상과학영화에서, 이야기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가 ‘사랑’이라니. 먼 미래 어딘지도 모를 까마득한 우주공간에서 쿠퍼를 딸과 접촉하게 해 준 방법이 고작 ‘사랑’이라니. 양자역학이니 중력 방정식이니 하는 어려운 개념들로 얽혀간 스토리는 너무나도 고리타분한 방식으로 풀려버린다.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도 중요한 영화의 키워드를 그냥 놓쳐버릴 수 없다. 이 고리타분하고 진부한 사랑타령이야말로 우리가 「인터스텔라」에서 읽어낼 수 있는 가장 큰 아름다움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나타나는 사랑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이야기 전면에 나타나는 아버지의 사랑이다. 머피가 어린 시절부터 몇십 년이 흐른 뒤까지 벽장 뒤 미지의 존재를 어렴풋하게나마 감지하고 끝내 그 정체를 알아낼 수 있게 한 것은 사랑이다. 쿠퍼가 4차원의 공간에서 밝혀낸 중력 방정식을 지구에 있는 딸에게 전달할 방법을 생각해내도록 한 것도 사랑이다. 웜홀을 통해 건너간 다른 우주에서 시간마저 뒤틀렸을 때, 이 시공간을 건너 다시 지구에 닿을 수 있는 그 어떤 것이 사랑이라는 이 설정은 진부하다. 그러나 우리는 애타게 머피를 부르는 쿠퍼를 보며 안타까움과 절실함, 그리고 동질감을 느낀다. 시공간을 넘어서 존재하는 사랑의 힘에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것을 보면 이 진부한 감정은 아직까지도 이토록 거대한 이야기의 결론이 될 수 있는 힘이 있는 듯하다.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인터스텔라」의 매우 중요한 등장인(?)물인 인공지능 로봇 타스가 쿠퍼를 비롯한 인간들과 본질적으로 구분되는 것도 이 부분이다. 타스는 SF계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로봇 HAL에 대한 놀란 감독의 오마주이다. 타스는 영화에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핵심 인물이자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사실상 이 로봇은 이 영화에 등장하는 어느 인물보다 똑똑하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인공지능 로봇은 한 인간이라면 미처 담아내지 못할 방대한 정보와 자료들을 보유하고 있고, 그 누구보다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며 복잡한 계산을 해낸다. 4차원 공간에 쿠퍼와 함께 들어가 중력 방정식을 구해낸 것 역시 이 인공지능이다. 하지만 타스는 구해낸 방정식을 머피에게 전달할 수 없다. 시계에 모스부호로 방정식을 심는다는 발상은 인간 쿠퍼의 경험과 절실함, 딸을 향한 사랑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고도의 인공지능과 인간이 구분되는 이 지점은 사실 만 박사가 먼저 언급해준다.      


가족 때문이군. 난 물론 가족이 없지만. 누군가와 함께 하고 싶은 강렬한 욕망. 바로 그런 감정이 우릴 인간으로 만드는 중요한 토대지. (...) 자네가 죽음을 앞두면 뭘 보게 될 것 같은가? 바로 자식들의 얼굴이야. 죽음을 맞는 순간에도 더 악착같이 살려고 하겠지. 자식들을 위해서.. (...) 이제 느껴지지? 생존본능. 그게 우릴 움직이는 원동력이고 그게 우릴 구할 거야. 


우리의 뒤통수를 제대로 쳤던 만 박사가 던진 이 의미심장한 말은 우리가 살펴본 영화 후반부에서 그대로 증명된다. 


  다시 원래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면, 이처럼 사랑은 시공간을 넘어 존재하며 인공지능과 인간을 명확히 구분해주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사랑과 같이 시공간을 넘어 존재하는 힘이 한 가지 더 등장한다. 바로 중력이다. 고차원의 존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차원과 접촉할 수 없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을 관통해 존재하는 유일한 물리적 힘인 중력을 이용해 쿠퍼에게 신호를 보낸다. 또 앞서 누누이 이야기했듯 쿠퍼가 머피에게 방정식을 전해줄 때 이용한 힘도 중력이었다. 따라서 사랑의 힘은, 이 영화에서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우주의 본질적인 힘인 중력과 매우 흡사하다. 중력이 더 높은 차원의 어떤 존재를 증명해주었으며 쿠퍼와 머피를 나사 본부로 이끌었듯, 사랑은 책장 뒤 아버지의 존재를 증명해주며 지구의 인간들을 대안의 세계로 이끌어준다. 결국 이 영화에서 ‘사랑’이라는 힘은 우주의 근원적인 힘이며 시공간을 초월해 존재하는 단 하나의 본질적인 힘인 셈이다.

  영화에서 쿠퍼, 브랜드와 함께 인듀어런스호에 동승한 톰이 웜홀의 원리를 설명해주던 장면을 기억하는가? 종이의 끝과 끝점을 이을 때, 종이 표면을 따라가면 그 거리가 매우 길어지겠지만 종이를 구부려 관통하면 그 거리를 단숨에 따라잡을 수 있다는 명쾌한 설명이었다. 어쩌면 이 영화에서 사랑도 그런 것일지 모르겠다. 절대 닿을 수 없을 거리에 있는 두 인물을 단숨에 이어주는 또 하나의 웜홀이 이 감정이었으니까. 

  이 부분에서 영화에 등장하는 두 번째 사랑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쿠퍼의 사랑에 비해서는 다소 덜 비중 있게 그려졌던 브랜드 박사와 애드먼즈의 사랑이다. 사실 이 영화가 ‘진부하다’는 평을 들은 것은 이 설정의 영향이 크다. 밀러의 행성에서 실패를 겪은 주인공들이 다음 행선지를 정할 때 나온 브랜드 박사의 대사이다.

      

이젠 머리가 아닌 심장을 따르고 싶어요. 너무 오랫동안 이론에만 집착해왔죠. (...) 사랑은 우리 인간이 발명한 게 아니지만 관찰이 가능하고 강력하죠. 뭔가 의미가 있을 거예요. (...) 죽은 사람을 사랑하는 게 사회적 효용인가요? 우리 인간은 이해 못하는 그 무언가를 의미할지도 몰라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더 높은 차원의 존재에 대한 증거일지 모른다구요. 난 오랫동안 못 본 사람을 만나겠다고 여기 왔어요. 어쩌면 죽었을지도 모르죠. 사랑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우리가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에요. 이해는 못하지만 믿어보기는 하자구요.    


  이 일장연설은 영화에서 다소 뜬금없으며, 그렇지 않아도 본인의 실수로 동료를 잃은 상황에서 어처구니없는 사랑타령을 하는 브랜드 박사에 대한 반감을 자아내기까지 한다. 하지만 위와 같은 생각을 거친 후 우리는 이 대사야말로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을 압축한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과학과 이성이 정점을 이룬 미래의 상황에 우주에 나선 인간이 믿을 수 있는 하나의 직관이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사랑이었다. 사실 브랜드 박사의 사랑은 쿠퍼의 사랑에 비해 설득력이 없다. 쿠퍼는 구체적인 행위로 그 힘을 증명했지만 브랜드는 단순히 ‘이 마음을 따라가고 싶어요’라는 주장 이상으로 뭔가를 증명해내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가 쿠퍼의 사랑의 힘을 목격했다면 이제 그녀의 주장을 믿지 못할 이유는 없다. 성공확률은 반반, 현재 남은 연료로 볼 때 두 행성 중 하나만 확인할 수 있다면 그때 우리가 사랑이라는 직관을 발휘하지 않을 이유가 없어 보인다. 모든 이성과 과학의 힘을 완전히 발휘하고 난 뒤 주인공들은 이 우주의 본질로 복귀해야 한다.

      


  이 영화는 결국 ‘인간성’에 대한 이야기다. 과학과 이성이 인간의 본질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우리가 이성적인 판단의 과정에서 흔히 인간의 직관을 일종의 노이즈로 치부하고 무시하려 애쓰지만 그 직관, 사랑은 결국 우리의 본질이라는 다소 거창한 주제를 던지고 싶었던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마치 중력처럼 작용하는 가장 큰 인력이 사랑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리 거창하지도 않다. 이 진부한 사랑타령이야말로 문학의 가장 오래된 주제이며 어디에나 존재하고 그렇게 많이 다뤄져 왔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는 감정이 아닌가. 우리는 이 영화와 이에 대한 거창한 논의를 통해서 그 아름다움을 다시 한번 확인했을 뿐이다. 


  이 영화가 인간성에 대한 깊은 고찰을 다룬다는 점은 역설적이게도 인공지능 타스의 모습에서 다시 한번 드러난다. 타스가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등장하는 HAL의 오마주라는 점을 앞서 지적했는데, 실제로 타스는 HAL과 그 모양, 성능 면에서 매우 흡사하다. 고도의 인공지능인 이 기계들은 자연언어를 인간과 같이 구사하며 인간들과 의사소통한다. 하지만 타스만이 가지고 있는 기능이 한 가지 있다. 바로 유머감각이다. 타스의 유머감각은 수치로 조절될 수 있으며, 그 수치가 100%에 가까워질수록 이 로봇의 드립력ㅎ은 향상된다. 

  영화를 볼 때야 그저 웃어넘기고 말지만, 생각해보면 유머는 사랑만큼이나 인간적인 능력이다. 언어유희는 고도의 상징화와 은유를 필요로 하며 상대와 자신이 공유하는 지식과 맥락을 파악해야 다룰 수 있는 까다로운 언어능력이다. 어떻게 보면 유머는 인간의 문학적 능력의 연장선이기도 하다. 타스는 이런 능력을 갖추고 있다.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삭막한 미래에, 현대 인간들이 상상하는 인공지능의 정점을 만들어냈는데, 미래 과학자들이 그 기계에 최종적으로 장착한 능력이 유머감각이라니. 타스를 만든 과학자들은 이 인공지능이 인간들과 함께 먼 우주로 길고 고독한 여행을 떠날 때, 그가 인간들과 유대를 형성하기 위해 필요한 마지막 능력이 유머감각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여기서 이성과 과학의 정점에서 또다시 인간성으로 복귀하는 모습을 다시 한번 목격할 수 있다. 

  유머감각을 장착한 타스는 그래서인지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HAL과 달리 인간을 배신하지 않는다. 많은 SF에서 인간이 만들어낸 고도의 인공지능은 결국 인간을 파멸시키지만 인터스텔라에서만큼은 인공지능이 인간의 가장 충실한 조력자로 남는다. 쿠퍼가 다시 우리 우주로 건너왔을 때 타스의 잔해를 모아 재조립하는 장면은 이 기계에 대한 쿠퍼의 애정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이 인공지능은 다른 영화의 그것들과 달리 인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놀란 감독이 냉철한 이성의 스탠리 큐브릭 감독과 차별화되는 것도 이 지점이다. 그래서 타스는, HAL의 오마주임과 동시에 ‘모노리스’에 대한 오마주이기도 하다. 인류 역사의 중요한 전환을 상징하는 검은 직육면체인 것이다. 타스는 비이성을 거쳐 이성의 정점에 도달했을 때 이루어 낸 인간성이다. 


<인터스텔라>의 TARS, <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HAL과 모노리스 


  이 영화는 가장 먼 미래, 미지의 우주와 삭막한 지구를 그리고 있음에도 그 거대한 서사시를 ‘인간성’으로 관통해낸다. 그래서 놀란의 우주와 미래는 냉소적이지 않다. 암흑은 미지의 공간이지만, 그렇다고 인간에게 두려운 공간으로 남지는 않는다. 5차원의 ‘그들’이 시공간을 넘어 신호를 보내오고, 몇십 년을 건너 다른 우주의 딸에게 아버지의 마음을 전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겼을 때 과학기술의 발전에 감탄하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씁쓸함을 느꼈던 것은 인간 고유의 것으로 여겨졌던 영역을 과학에 침범당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통합이 주장되는 요즘 「인터스텔라」에서 인간 본질과 과학이 만나는 지점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주는 우리 머리로 상상하기에 너무나도 거대한 공간이기에 인간을 압도하고, 무력감을 느끼게까지 한다. 하지만 인간의 힘, 아름다움은 여기 있다. 우주는 인간에 대해 생각할 수 없지만, 인간은 우주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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