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르담 드 파리’에 나타나는 인간의 숙명과 사유체계에 대한 고찰
빅토르 위고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Notre-Dame de Paris)’는 프랑스 뮤지컬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등장인물 중 콰지모도를 전면에 내세워 ‘노트르담의 꼽추’라는 제목으로 작품이 알려져 있고 이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콰지모도의 가슴 아픈 사랑이야기 정도로만 알고 있다. 뮤지컬은 원작의 제목을 따르고는 있지만 이 역시도 에스메랄다, 콰지모도, 페뷔스, 그리고 프롤로의 감정선과 관계를 중심으로 흘러간다.
그러나 이 작품에 등장인물을 내세우는 제목을 붙이고, 이들의 단순한 애정관계에만 초점을 두는 것은 자칫 작품에 대한 몰이해를 야기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작품의 참모습을 왜곡시킬 염려가 있다. 원작인 소설을 읽어본다면 이 작품의 진짜 주인공은 에스메랄다도 콰지모도도 아닌 노트르담 대성당과 15세기 파리 그 자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문학사가 랑송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책의 참다운 재미는 가지가지의 삽화와 광경 묘사 속에서 찾아야 한다. ...(개개의 인물보다도)더 생생한 것은 군중이요, 거지와 부랑배의 우글거림이다. 그보다 더 생생한 것은 도시 자체요 ..... 15세기의 파리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더 생생한 것은 그 그림자가 도시를 덮고 있는 성당이다.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은 이 소설 속에서 진정한 넋을 가진 유일한 개인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살아있는 광경의 묘사와 인물들은 웅장한 서사시를 이루어낸다.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는 그 속에서 고뇌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인물을 생생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뮤지컬에 녹아 있는 노트르담과 파리, 그리고 그 시대의 모습을 읽어내야 한다.
감상자는 뮤지컬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을 사랑하거나 혹은 미워할 수 있지만, 그 평가가 가장 극단적으로 갈릴 것 같은 인물은 부주교 프롤로이다. 그는 자신이 한평생 굳게 믿어온 선과 악 사이에서 깊이 고뇌한다. 평생을 학자로, 성직자로 살아온 그는 그 어떤 속세의 욕망에도 마음을 두지 않고 오직 신만을 사랑해왔지만 아름다운 에스메랄다가 그의 삶에 들어온 이후 그 견고하던 세계는 흔들린다. 소설에서 프롤로는 어릴 때부터 라틴어 읽기를 배우고 늘 엄격한 자세를 유지하며 성직자로 길러졌다. 어린 프롤로는 책에서 ‘침울하고 근엄하고 성실한 아이였다’고 묘사된다. 아주 어릴 때부터 그는 세상의 어떤 일에도 관심두지 않고 신학공부에만 몰두했으며 이른 나이에 노트르담의 가장 젊은 전속 신부가 된다.
그런 그에게 욕망의 대상인 에스메랄다와 그녀를 향한 자신의 정념은 악(惡) 그 자체이다. 신과 종교만이 절대적인 프롤로의 세계에서 사랑, 특히나 이교도이며 집시인 에스메랄다를 향한 사랑은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그의 고뇌가 드러나는 부분이 2막의 8번 넘버 <être prêtre et aimer une femme>, 즉 <신부가 되어 한 여자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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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알기 전 나는 행복한 남자였네
내 존재 깊숙이 숨겨진 청년시절의 억눌린 성욕을 잘 눌러왔었지
나의 아내 나의 애인은 종교와 학문이었네
아! 신부가 되어 여자를 사랑하는 것은
자기 영혼의 모든 열정으로 여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역경과 유혹에도 나는 흔들리지 않았지
대성당의 탑처럼 반듯하고 자랑스럽게
네가 내 안에 들어와 벌레처럼 갉아먹기 전까지
내 안의 휴화산에 불을 지펴놓기 전까지
아! 신부가 되어 여자를 사랑하는 것은
자기 영혼의 모든 열정으로 여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나는 고행하며 여자를 멀리했었지
한밤중에 갑자기 나의 기도는 흔들리고
동이 틀 무렵에 널 보고픈 마음으로 창문을 열었네
아! 신부가 되어 여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 영혼의 모든 열정으로 사랑한다는 것, 사랑한다는 것은
아! 신부가 되어 여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한손으로 나를 어루만져주고 다른 한 손으로는 고문하는 듯 하구나
나의 잘못을 속죄케 하라
너는 지옥으로 갈 것이니 나도 거기로 가리
그곳이 내게는 천국이리라
아! 신부가 되어 여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 영혼의 모든 열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아! 신부가 되어 여자를, 여자를 사랑하는 것은
이 넘버에 실린 프롤로의 고뇌는 책에서는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난 행복했어, 적어도 그렇게 믿고 있었지. 난 순수했고, 내 마음은 투명한 빛으로 가득차 있었어. 이 세상에 내 머리보다 더 당당하게 쳐든, 더 빛나는 머리는 없었어...”
“...그때 나는 악마의 함정을 보는 듯했고, 당신이 지옥에서 왔다는 것을, 당신이 지옥에서 온 것은 오직 내 영혼을 멸망시키기 위해서라는 것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았어. 나는 그렇게만 믿었어.”
“오! 아가씨, 날 가엾게 여겨주오! 당신은 스스로 불행하다고 믿고 있지만, 아! 슬프다! 당신은 불행이 무엇인지 몰라. 오! 한 여인을 사랑하는 것! 성직자라는 것! 미움을 받고 있는 것! 발광적으로 그녀를 사랑하는 것...”
“...당신이 지옥에서 왔다면, 나도 당신과 함께 지옥으로 가겠어. 난 그만한 일은 다 했으니까. 당신이 있다면 지옥도 내게는 천국이야. 당신을 보는 것은 주님을 보는 것보다도 더 즐거워.”
프롤로에게는 오랜 세월동안 굳게 믿어온 선악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다. 그 기준은 종교였다. 그러나 잠들어있던 인간적인 욕망이 깨어난 후 프롤로는 그동안 알아오던 선을 더 이상 추구할 수 없게 된다. 물론 뮤지컬에서 프롤로는 페뷔스를 찌르며 에스메랄다의 뒤를 쫓고 결국 사형으로 내모는 악행을 저지른다. 심지어 소설에는 이 인물의 스토킹과 범죄 모의와 찌질함이 매우 길고 자세하게 묘사되어있어 혐오감마저 불러일으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인물이 어딘가 짠한 구석이 있고 그 마음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가기도 하는 것은 그가 완벽한 악인인것 만은 아니기 때문인 듯 하다. 만약 그가 에스메랄다를 없애버리고 자신의 양심 앞에 전혀 부끄러움이 없는 척 살아가려 했다면 이 악인을 동정하기 힘들겠지만 뮤지컬에서도 소설에서도 그는 에스메랄다를 따라 지옥에 가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내비친다. 이런 약한 모습을 보일 때 찔러도 피한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그에게서 인간적인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소설에만 등장하는 프롤로의 애물단지 남동생도 그를 한층 더 인간적으로 보이게 한다. 부모님의 죽음 이후 프롤로는 갓난아기였던 동생을 온전히 책임지게 된다.
아직 책밖에는 사랑하지 않았던 그에게, 이 인간에 대한 애정이란 참으로 이상하고도 즐거운 것이었다. 그 애정은 신기할 정도로까지 커져갔다. 그처럼 새로운 넋에게 그것은 첫사랑과도 같은 것이었다. ...동생을 생각하는 것은 휴식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학문의 목적이 되었다. 그는 하느님 앞에서 책임진 한 사람의 장래를 위해 자기를 송두리째 바치기로 각오하고, 자기 동생의 행복과 출세 외에는 아내나 다른 어린애를 결코 갖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프롤로는 애초에 인간이었다. 자신에게 맡겨진 작은 생명에게 무한한 애정을 느낄 수 있는 존재였다. 언뜻 보기에 프롤로가 중년에 이르러서야 여자에 대한 첫 사랑을 시작한 것처럼 보이나 사실 그에게 사랑이라는 인간적인 감정은 오래전부터 존재하고 있었으며 그는 누군가를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할 수 있는 인간이었다. 근원이 같은 그 두 감정은 그 대상이 어린 동생이었을 때는 완전한 선(善)이었으나 이 감정이 여자를 향하게 되면 완전한 악(惡)이 된다.
이 작품은 15세기 파리의 노트르담 속에서 고뇌하는 인물들의 이야기이며 인물을 이해할 때 그 배경을 함께 생각해야 함을 앞서 언급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시대가 작품 속에서 어떻게 그려지고 있는지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뮤지컬에서는 여러 넘버에 시대에 대한 위고의 시선이 녹아있는데, 그중 2막의 첫 번째 넘버인 <Florence>는 유일하게 스토리의 진행이 아닌 시대 상황만을 다루고 있다. 뮤지컬을 처음 감상한다면 다소 뜬금없게 느껴질 수도 있는 곡이다. 하지만 사실상 이 곡은 ‘노트르담 드 파리’의 주제를 가장 직설적으로 꿰뚫어 표현한 중요한 넘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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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와 르네상스, 이야기를 들려다오
브라만트와 단테의 지옥편을 들려다오
피렌체에서는 지구가 둥글 거라 하고 지구상에는 또 다른 대륙이 있을 거라 하네
배들은 벌써 인도로 가는 길을 찾기 위해 대서양을 향해 떠났네
루터는 신약을 다시 쓸 것이고 우리는 분열의 시대 문턱에 서 있네
구텐베르크는 세상을 변화시켰고
뉘른베르그 인쇄소에서는 쉴 새 없이 인쇄물이 쏟아지네
인쇄된 시들과 연설문과 팜플렛
새로운 생각들이 모든 것을 바꾸리라
작은 일은 항상 큰일들의 일부에서 오는 법
그리고 문학은 건축을 파괴할 것이다
교과서는 대성전을 파괴하고 성경은 종교를, 인간은 신을 파괴할 것이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파괴할 것이다
탐험선은 인도로 가는 길을 찾기 위해 대서양을 향해 떠났네
루터는 신약을 다시 쓸 것이고
우리는 분열시대의 문턱에 서 있네
하나가 다른 하나를 파괴할 것이다
소설에서 이 부분은 5부의 마지막장을 구성하고 있다. 장의 제목인 ‘이것이 저것을 죽이리라’의 의미에 대해 설명하면서 빅토르 위고는 시대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을 보여준다. ‘이것이 저것을 죽이리라’의 구체적인 주체와 대상은 책과 건물로, 즉 ‘책이 건물을 죽이리라’는 의미이며 이는 다시 ‘인쇄술이 성당을 죽이리라’이고 궁극적으로 ‘문학이 건축을 죽이리라’로 해석될 수 있다. 이것은 하나의 기술이 바야흐로 다른 기술의 자리를 빼앗게 되리라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기술의 대체가 아니다.
책에서 위고는 건축물, 그 중에서도 특히 성당을 하나의 ‘성서(책)’로 바라본다. 최초의 바위 덩어리는 알파벳이며, 그 위에 하나의 돌을 세우면 비로소 그것은 하나의 문자이고, 돌에 돌을 겹쳐 쌓고 이으면 낱말이며, 하나의 건축물은 비로소 하나의 글로써 탄생한다는 것이다. 글을 쓰는 것과 마찬가지로 건축은 일종의 표현수단이며 역사의 서사로서, 상징으로서 건축물을 바라볼 수 있다.
다시 말해 건축물을 하나의 상징체계이며 즉 하나의 언어이다. ‘근본 관념인 말은 이 모든 건축물들의 내용뿐만 아니라 그 형식에도’ 있다. 예를 들어 ‘솔로몬의 신전은 단순히 성서의 제본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성서 그 자체’이다. 인간이 생각하는 것을 표현해주는 수단이 언어이듯, 건물 역시 그것의 위치와 형식, 재료, 쌓아올려진 방식 등 모든 것으로 그 자신이 구현하는 사상을 나타낸다. 따라서 건축술은 인간의 정신세계를 재현해내는 또 하나의 언어이다. ‘글’이 모두의 것이 아니었던 시기에 사상은 건물이라는 책으로만 쓰일 수 있는 것이었다. 시대가 흐름에 따라 땅의 주인이 바뀌면 건축은 그 양식을 누적해갔다. 건축물은 성서이자 역사서였다. 사회의 모든 물질적인 힘과 지적인 힘은 건축에 집중되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물론 성당일 것이다. 종교의 시대였던 중세에 신에게 바치는 최고의 찬사이자 신을 보여주는 가장 가까운 수단은 성서가 아닌 성당이다. 구텐베르크에 이르기까지 건축술은 가장 주요하며 보편적인 문자였다. 책에서는 ‘동양에서 시작되고 그리스, 로마의 고대에 의해 계속된 이 화강암 책은, 중세가 그 마지막 페이지를 썼다’고 말한다.
건축술의 최대의 산물은 개인적인 작품이라기보다 사회적인 작품이요, 천재적인 사람들이 내던져놓은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전통을 겪은 민중들의 산아요, 한 국민이 남겨놓은 공탁물이요, 허구한 세월을 이루어놓은 퇴적물이요, 인간 사회의 계속적인 발산물의 침전이라는 것을...
건축술은 15세기까지는 인류의 주요 장부였다는 것, 그동안 이 세상에 조금 복잡한 사상치고 건물이 되지 않은 것은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 모든 종교의 율법처럼 모든 민중의 사상은 그것의 건축물을 가졌다는 것, 그리고 끝으로 인류는 어떠한 중요한 생각도 반드시 돌로 썼다는 것. ... 건물은 얼마나 견고하고 영속적이고 내구력 있는 책인가!
인간의 가장 중요한 사유체계는 언어이다. 사유체계는 인간의 마음과 생각이 작동하는 방식을 결정짓는데, 따라서 이미지로 이루어지는 사유와 말로 이루어지는 사유, 글로 이루어지는 사유는 그 내용이 같더라도 절대로 완전히 동일할 수 없으며 그 결은 모두 제각각이다. 사유체계는 단순히 정신적인 작용이 아니다. 사유체계의 전환이 일어난다는 것은 인간이 새로운 체계를 위한 신체 테크놀로지를 정립하고 완전히 새로운 방식과 결로 생각하고 표현하게 되는 것이며 이에 따라 세상의 모습도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도 모두 크게 바뀌게 된다. 인쇄술의 발명은 건축술의 입지를 크게 흔들어놓는다. 기존에도 물론 글이 있었지만, 이전까지 글은 소수의 지배계층이 점유하고 있었고 따라서 모두가 공유하는 보편적인 사유체계가 아니었다. 인쇄술의 발달이 소통 방시에 극적인 변화를 가져왔고 이것이 비로소 근대로의 이행을 가능하게 했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앤더슨(Benedict Anderson, 1936-)은 <상상의 공동체>에서 민족국가의 탄생을 도운 한 요소로 인쇄술의 발달을 꼽았다.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한 루터 역시 큰 역할을 했는데 이를 뒷받침한 것은 단연 인쇄술일 것이다. 그래서 <Florence>에서 루터의 신약이 언급된 것이다. 빅토르 위고는 5부 2장에서 인쇄술의 발달이 인류 문명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게 되는지를 상세히 설명한다. 이 부부이 소설의 서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작지만 위고의 문명사적인 관점을 잘 드러내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선과 악 사이에서 고뇌하는 프롤로에 대해 얘기하다가 여기까지 왔다. 다시 기존의 이야기로 돌아가겠다. 맨 처음에 언급했듯 이 작품의 주인공은 노트르담 대성당이다. 노트르담으로 상징되는 종교, 역사, 책, 건축은 프롤로에게는 삶 그 자체이다. 그에게 노트르담과 종교, 신은 확고하고 절대적인 가치판단의 기준이다. 노트르담이 이 책에 등장하는 상징적인 종교 건축물이라는 것을 고려할 때, 그리고 우리가 앞서 다룬 ‘사유체계로서의 건축’을 생각할 때 종교와 신은 프롤로의 절대적인 사유체계이다. 어려서부터 프롤로는 카톨릭의 사유체계 안에서 철저히 성직자로 자라왔다. 노트르담은 성서 그 자체이고 역사이며 거대한 책이다. 그러한 노트르담이, 건축이 인쇄술에 의해 파괴되는 것은 결국 프롤로의 세계가 붕괴하는 것과 같다.
이 점에서 콰지모도는 프롤로와 운명을 같이한다. 콰지모도에게 노트르담은, 성직자인 프롤로에게보다 더 큰 의미를 가진다.
시간과 더불어 이 종지기를 성당과 맺어주는 뭔지 알수 없는 밀접한 유대가 생겼다. 알려지지 않은 출생과 기형적인 체격이라는 이중의 숙명에 의해 영원히 세상과 격리되고, 어려서부터 그 이중의 건너뛸 수 없는 원 속에 갇히게 된 이 가련하고 불쌍한 사나이는, 자기를 그 그늘 속에 맞아들여 준 성당의 벽 너머로는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보지 않도록 길들여져 버렸다. 노트르담은 그가 자라나고 커감에 따라, 그에게 차례차례로, 달걀이었고, 보금자리였고, 집이었고, 조국이었고 세계였다. ...그러므로 콰지모도는 자기의 하렘 안에 열다섯 개의 종을 가지고 있었던 셈이지만, 큰 마리가 애첩이었다.
콰지모도는 어려서부터 성당 안에서 자랐고, 자신을 멸시하는 사람들 틈에서 유일한 친구이자 말벗은 성당의 동상들이었다. 성당 종치는 일을 맡은 그는 종들을 마치 연인처럼 다룬다. 그에게 노트르담은 세상 그 자체이다. 콰지모도와 프롤로는 닮았다. 그들에게 노트르담은, 종교는 세상이다. 건축이 위태로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은 자신들의 세계에 대한 위협을 떨칠 수 없을 것이다. 세계가 붕괴하고 사유체계가 변화할 때, 그러한 격변 속에서 프롤로는 고뇌한다.
프롤로의 고뇌는 중세의 종말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있지는 않다. 그러나 신만을 바라보던 그의 세계가 이방인인 집시 여자에 의해 흔들린다는 점에서 프롤로는 시대적으로나 심정적으로나 격변의 중심에 놓인 듯하다. 따라서 이 인물들의 서사는 15세기 파리에서 고뇌하는 인간들의 이야기일 뿐 아니라, ‘이것이 저것을 죽이는’시대 배경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자기 세계의 붕괴를 받아들이는 프롤로의 태도다. 그는 에스메랄다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그로 인한 고뇌를, 자기 세계의 기준에서 악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마음을 ANÁΓKH, 즉 숙명으로 받아들인다. 자신이 에스메랄다를 쫓아다니는 것, 열렬한 사모의 대상인 에스메랄다는 멋진 제복을 입은 중대장에게 빠져있는 것, 정작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신을 두려워하며 증오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숙명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건축의 붕괴와 문학시대의 도래 역시 숙명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 프롤로의 종교세계와 믿음의 격변이 시대적 격변의 축소판이라 했으니 시대의 격변 역시 숙명적인 것이라 받아들여도 무리는 아닐 듯하다. 숙명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아나키아’는 실제로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하나의 키워드이다. 소설의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 위고는 노트르담의 성당 한 구석에 손으로 새긴 이 낱말을 발견하고 이에 입각해 책을 썼다. 우리는 이 소설에서, 또 뮤지컬에서 숙명적인 격변의 시대를 살아가는 주인공들의 숙명적인 사랑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다.
르네상스는 단순한 고대 그리스, 로마 문화의 부활운동만이 아닌 인간성의 해방과 인간의 재발견이며 합리적인 사유와 생활태도의 길을 열어 준 근대문화의 선구라고 할 수 있다. 새로운 시대를 맞이한 가운데 프롤로는 종교로 점철되었던 중세적 가치관에서의 선악을 두고 고뇌한다. 성직자라는 그의 특수한 지위를 종교를 위주로 돌아가던 중세 당시를 대표하는 인물상으로 볼 때 그렇다. 그런 그가 신에 대한 관심을 접고 사랑이라는 인간적인 고민을 하게 됐다는 것이 중세에서 르네상스로의 이행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줌을 앞서 살펴봤다. 현대의 우리 입장에서의 선악은 프롤로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모습일 것이다. 그때와 지금의 사유체계가 다르고 이에 따른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절대적인 선이, 절대적인 악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지만 사실상 어떤 사유체계와 가치관도 절대 영속적일 수 없다. 이에 따라 그동안 알아오던 선도, 악도 변화한다. 그리고 그 변화는 숙명적이다. 그러나 이 격변은 개개인에게는 너무나 큰 세계의 붕괴로 다가오기 때문에, 인간은 그 속에서 갈등하고 고통스러워할 수밖에 없다. 선악의 문제에서 고뇌하는 것은 인간의 ANÁΓKH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