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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른사과 Dec 15. 2020

"빛의 공간"으로의 초대

<PACE Gallery Seoul> Bending Light  2019


1. Bending Light


해석하자면 빛의 굴절, 참 재미없는 단어가 아닌가 하고 생각했었다. 갤러리에 올라가는 길도 그러했는데, 환영받지 못하는 느낌의 작은 출입구 옆에 단단히 붙은 PACE 라는 갤러리 특유의 글씨체가 아니었다면, 나는 영영 서울에서 전시되는 터렐이나 플래빈을 만나보지 못했을테다. 뻑뻑한 유리문을 힘겹게 열고 비좁은 엘레베이터를 탔다.  5층으로 올라가서야 비로소 아, 갤러리구나 싶은 곳에 들어설 수 있었다. 초라한 입구에 비해 갤러리 문을 열고 들어서자 마자 눈에 들어온 것들은 놀랍게도 책이나 미술 잡지에서 그간 흔히 보아왔던 작품들 이었는데, 좁은 공간에 다닥다닥 들어선 작품들이 왜인지 안쓰러웠다. 


해당 전시는 지난 2020년 6월 5일부터 8월 14일, 이태원에 자리한 페이스 갤러리 서울에서 약 2개월 가량 이어졌으며 캘리포니아 출신의 빛과 공간 운동 light and space movement 을 이끈 세 아티스트 피터 알렉산더 Peter Alexander (1939 - 5. 2020, Santa Monica CA), 로버트 어윈 Robert Irwin (1928 - , Long Beach CA), 제임스 터렐 James Turrell (1943- , LA CA) 에 뉴욕을 중심으로 활동한 미니멀리즘 예술의 거장이자 형광등을 이용한 라이트 아트를 선보였던 댄 플레빈 Dan Flavin (1933-1996, Jamaica NY)의 작품이 전시 되었다. 


이들 작품이 보여주는 밀접한 연관성, 즉 물질과 형태, 빛, 공간등이 만들어 내는 말로 미처 표현할 수 없는  미적 감동을 국내의 관객들게 제안한 것이다. 제임스 터렐은 빛을 기반으로 한 자신의 작품을 경험하는 것은 언어 "바깥의" 또는 언어를 "넘어선" 경험이라고 자주 표현했는데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마트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는 형광등을 빈 공간에 단순하게 배치 한 것만으로 관람자로 하여금 독특한 지각 경험을 일으키는 플래빈의 작품은 역시 언어로 표현되기 어렵다. 



2. 개념과 추상, 미니멀리즘, 그리고 빛과 공간 미술운동


저서 발칙한 현대 미술사 (원제 : What are you looking at) 에서 윌 곰퍼츠 Will Gompertz 는 미니멀리즘을 이렇게 표현했다. 


" 소박하고 사려깊은 이. 내재된 힘이 탄탄하기에 확고한 원칙을 애써 과시하거나 굽힐 필요가 없는 이. 사람들이 존경할만한 아우라가 있는이. 주변의 모든 존재를 소란스럽고 멍청한 것으로 보이게 할 만큼 자신만의 조용한 스타일이 있고 다소 차가운 인상을 주지만 숨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 고 


1960년대의 산물인 미니멀리즘은 극도의 간결과 형식적 정제미를 보여주는 미술적 형태로 도널드 저드 Donald Judd와 같은 아티스트들은 기하학적 형태로 간결성을, 공간과 빛을 사용하는 방식으로 물질성의 깊이를 표현하였는데 이로 하여금 관람자의 감정을 흔들기보다 신중한 생각에 잠기게끔 한다.


이번 전시에서 소개되는 플래빈은 이런 미니멀리즘의 대표적 아티스트로 당시 형광등이라는 산업적 소재를 빈 공간에 배치, 나열함으로써 인공의 빛의 굴절과 반사에 의한 회화적 색채를 이끌어 내며 공간적 숭고미를 강조한 예술을 이끌었다. 


미 동부에서 플래빈이 형광등으로 빛을 통해 변화되는 시공간을 표현하는 예술을 지속해 나갔다면 비슷한 시기 미 서부의 세 예술가는 또 한명의 미니멀리즘 아티스트인 존 맥러플린 John Mclaughlin 의 영향으로 빛과 공간 미술운동 light and space movement 을 이어갔다. 이는 미니멀리즘과 기하학적 추상 미술, 그리고 전후 예술의 주를 이루었던 옵 아트(optical art) 에서 비롯된 예술 경향 중 하나로 빛의 지각 (perceptual) 현상에 중심을 두고 유리, 네온, 형광, 레진과 같은 물질에 반사하거나 투영되는 빛의 형태와 색의 변화를 다양하게 표현하는 작품을 꾸려 갔다. 


관람객이 있는 공간 안에 존재할 때, 진정으로 활성화 되는 예술이기 때문에 다만 조소가 아닌 오브제와 빛, 공간으로 이끌어내는 이러한 예술은 행위 예술과도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겠다. 



3. 조소가 아니라 하나의 오브제, 그리고 그것에 투영된 빛의 굴절이 야기하는 고요



"광휘를 사로잡아 재 배치한다." 라는 일종의 주제를 가진 이번 전시에서 보여주는 네 작가는 빛을 표현하는 저마다의 주된 오브제를 가지고 있다. 피터 알렉산더는 우레탄으로 제임스 터렐은 LED로 로버트 어윈은 불이 꺼진 형광등으로, 그리고 댄 플래빈은 불이 켜진 형광등으로 각각의 빛을 표현한 것. 


-  제임스 터렐의 아틀란티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페이스에 전시 된 제임스 터렐의 "아틀란티스"는 2019년 신작으로 70만 달러 (한화 약 7억 6천만원)을 호가한다고 했다. 갤러리 벽면에 설치된 가로 185.4 cm 세로 142.2 cm크기의 작품에서 2시간 30분간 변화하는 LED로 만든 여러층의 빛은 지속적으로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하늘의 다양한 색채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제주의 본태에서 처음 만났던 그의 초기 작품 중 하나인 <범고래 블루>가 준 터렐 특유의 고요함이 마찬가지로 느껴졌다. 학부에서 인지 심리학과 수학, 지질학, 천문학 등을 공부했던 그는 초기에 프로젝터로 빈 공간에 빛을 반사시키는 단순한 방식으로 사람의 지각과 공간에 퍼지는 빛의 굴절에 따라 보여지는 색의 다양함 앞에서 관람자를 숙연케 하는 명상적 미술을 보여 주었다. 마크 로스코 Mark Rothko가 물감으로 색의 불분명한 경계를 캔버스에 회화적으로 표현했다면, 터렐은 이를 빛과 공간으로 표현한 것. 


사실 나는 이때 멋도 모르고 관람했던 제임스 터렐에게 그저 반해버리고 말았는데 무한 거울방 앞에서 그에 관하여 소개해 주셨던 도슨트 분께서 설명을 잘 해 주신 탓도 있었던 것 같다. 이후 순전히 제임스 터렐을 보기 위해 5시간을 운전해서 찾아간 원주의 뮤지엄 산에서는 자꾸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던 도슨트로 인해 터렐의 감동이 반감 되었기 때문에 (제발 도슨트 여러분, 같은 말 반복하시다 보면 가끔 딴 생각 드는건 이해 하겠지만, 시간에 맞춰 끝내야 하는 것도 알겠지만.. 그래도 작품과 작가에 감정을 좀.. 넋 나간 얼굴로 외운것만 읊지 마세요. 다 보여요...... ) 더 다양한 작품을 봤음에도 터렐에 관해 적잖이 목말라 있었던 때 였다. 정보도 찾아보지 않고 한국에도 페이스 갤러리가 있다카더라. 라는 기대 없이 찾아간 전시였기 때문에, 우연히 다시 만난 터렐이 기쁘지 아니할 수 없었다. 



- 피터 알렉산더의 우레탄 입체 모형


물론 터넬이나 이후 플래빈도 좋았지만, 이 전시에서 오랫동안 나의 시선을 이끌었던 것은 바로 피터 알렉산더의 5개의 우레탄 입체 모형이었다. 각각의 크기는 가로변과 세로변이 평균 20cm 정도, 그 자리에 멈춘 오브제들은 빛을 적당이 흡수했고 바르게 반사시켰다. 전시가 있기 얼마 전인 올해 5월에 별세한 그의 최근 작으로 그는 초기에 서프 보드에 광택을 내는 재료인 레진을 틀에 붓는 기법으로 작업을 하였다. 



미술로 취급되지 않았던 소재인 레진이나 플라스틱은 캘리포니아 남부의 항공 및 방위 산업과 밀접하게 관련된 흥미로운 초 현대적 재료로 받아들여 지기도 했다. 비평가들은 이 특유의 탁한 색감이 로스앤젤레스 하늘의 스모그로 인해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노을의 강렬한 색감이나 창백하고 차가운 톤의 구름이나 안개와 같은 물과 빛이 만드는 시각적이고 현상적인 효과를 표현한다고 하였다. 



이 알렉산더의 모형을 중심으로 왼쪽과 오른쪽으로 형광등을 주제로 한 작품이 전시가 되어 있었는데, 왼편의 로버트 어윈은 빛을 발하지 않는 형광등이라는 물질 그 자체의 모양과 광택, 색감으로 시작적 리듬을 강조한 불꺼진 형광등이 소재라면 오른편의 플래빈은 형광등에서 발하는 빛의 굴절로 생성되는 색감과 형태의 고요를 강조한, 불 켜진 형광등이 소재 라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이 두 사람은 1980년대 설치작업에 형광을 서로 대비되는 방식으로 사용한 적도 있다고 한다. 



- 로버트 어윈의 벨몬트 해변


1950년대부터 예술계에 발을 들였던 로버트 어윈은 1960년부터 빛과 공간 운동에 동참하는 주요 미술가로 활동하며 설치미술의 길로 들어선다. 그는 인간의 지각적 능력을 유연하다고 간주하여 이 한계성을 변화시키고 확장하며 사물의 속성을 드러내는 방식의 탐구를 지속해 왔다. 


벨몬트 해변 Belmont shore 2018 은 불이 켜지지 않은 형광등을 투명한 여러 색의 젤로 덮고 빈 벽에 각기 다른 간격으로 분리하여 세로로 배치 되었다. 색과 형태, 빈 공간과 그 위로 덮힌 그림자와 반사되는 빛으로 경계를 허물어 인간의 지각에서 사물의 모양과 색을 흐트러 뜨리도록 교란 시키며 시야를 즐겁게 한다. 



- 댄 플래빈의 무제


플래빈의 Untitle은 그의 전성기인 80년대 중반에 제작된 형광등 설치 작품중 후기 작업으로 전환되던 시기에 만들어 진 작품으로 전시관 한 켠 모서리 공간에 형광등을 놓아 빛으로 하여금 마름모꼴의 그림자를 만들어 냄으로써 가상의 조형을 만든다. 조형을 에워싸는 회화적 색감은 빛의 굴절로 인해 표현되는 다양한 색으로 메워졌다. 별 것 아닌 하나의 공산품을 빈 공간에 배치함으로써 빛이 만들어낸 색감과 형태를 엄숙하게 감상할 수 있다. 



4. 광휘를 사로 잡아 재 배치


안내서에는 몇번이고 이 단어가 반복된다. 광휘를 "사로 잡아" 재 배치. 네 명의 아티스트는 각자 자기만의 물질을 가지고 특유의 방법을 가지고 저마다 묵직한 인상을 주는 작품을 만들지만, 결국 이들의 주제는 단 하나,  인공적이든 자연적이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빛을 공간에 반사하여 색을 만들고, 스미게 하여 다양한 형태를 내보이고, 지각에 닿게 하여 경계를 변화시키고, 적절한 위치에 서서 가공의 공간을 보여주는 것. 그것 앞에 선 우리에게 고요를 선물하고 경험케 함으로서 예술을 완성시키는 것이 아니었을까. 


5. Pace Gallery


1960년 아니 글림처 (Arne Glimcher)가 돌아가신 자신의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만든 페이스 갤러리는 현재 그 시작점이 었던 보스톤에서 뉴욕으로 이주하였고 이후 팜비치, 팔로알토, 제네바, 홍콩, 런던을 거쳐 현재 서울에까지 분점을 차렸다. 비록 한남동에 위치된 페이스 갤러리는 뉴욕의 그것에 비해 협소할 수 있겠지만 이 곳에서 경험한 전시는 올해 본 그 어느 것 중 가장 인상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갤러리에서 이루어지는 전시는 대부분 그 갤러리의 성향을 머금고 있기 마련인데, 자칫 어렵고 난해할 수 있는 동시대 미술을 관람객과 함께 경험하고 쉽게 전달 하고자 하는 현재 페이스 갤러리가 가고자 하는 방향을 잘 알 수 있었다. 



왜 항상 동시대 미술을 설명하는 글들은 어려울까. 고민했었다. 많이 알아야 많이 보이고, 난해하고 모호할 수 있는 경계에 선 것들을 조금 더 직설적으로 풀이하여 말해야 하기 때문이 아닐까. 이 글을 쓰면서 생각했다. 벌써 12월의 끝자락이다. 더운 여름에 다녀온 전시를 발시려운 겨울에 정리해 본다. 내년엔 더 많은것을 보고 느낄 수 있는 내가되길, 바래본다. 



*해당 전시의 해설 서문과 터렐의 홈페이지, 위키피디아, 각종 기사, 윌 곰퍼츠 저서의 발칙한 현대 미술사, 김영애 저서의 갤러리스트를 참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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