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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sul Mar 07. 2017

낯선 곳에서의 자아 성찰

미국으로 이민을 온지 6개월.


작년에 남편을 따라 이민 준비를 하면서 한국에서의 지난 인생에 대한 아쉬움 및 허무함과 더불어 미국에서의 새로운 삶에 대한 각오와 설렘을 안고 이곳에 왔다. 아는 이 하나 없는 곳에서 남편 하나만을 믿고 새로운 삶을 일구는 것에 두려움도 있었지만, 반면에 나라는 사람에 대한 편견이 없는 곳에서 새로운 나를 발견하고 만들어갈 수 있겠다는 기대, 한국보다 넓은 세상에서 생각지 못한 기회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다. 다행히 영어는 자신 있었기에 적응이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도 있었다.

 

그러나 지난 6개월이라는 시간을 행정적인 일 처리와 동네 지리 익히기, 연말연시 가족 행사 등으로 보내고 나니, 어느덧 반년이나 흘렀음에도 나는 여전히 직업도 없고 친구 하나 없는 상태로 오늘도 남편이 일하러 간 동안 집을 지키고 있다. 학교나 직장에 소속되어 이민 온 것이 아니고, 남편이 한국인이 아닌 데다가, 큰 도시도 아니고 교회도 다니지 않으니 도무지 사람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물론 진전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처음 여기에 도착한지 1개월 반 만에 뉴욕에 있는 한국 기관에서 두 달 동안 임시로 일을 하면서 잠시나마 뉴요커 흉내를 내며 신나게 출근을 했었다. 그 후 정규 포지션으로 이어지길 바랬지만 그렇게 되지 않아 몹시 실망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심심해서 여러가지 활동을 알아보던 중에 동네 공공 도서관에서 하는 무료 영어회화 수업을 알게 되어 열심히 다니는 중이다. 요가 학원도 꾸준히 다니고 수업에서 알게 된 친구 한 명과 따로 만나기도 했다. 그래도 여전히 아이도 없고 특별한 일도 없는 이민자 백수 주부의 일상이란 대부분 집에서 혼자만의 소일거리로 채워지기 마련이다.


시간이 많고 할 일은 없는 것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이들이 보기에는 배부른 소리라고 할 수도 있지만, 특별한 취미도 없는 나에게는 할 일을 만들고 찾는 것이 고역이다. 또한 사람은 바쁠 때 더 많은 일을 하는 것이 진리인지라, 막상 자유 시간이 너무 많으니 잠만 늘고 하는 일도 없이 금세 하루가 가 버리기 일쑤였다. 그러는 와중에 자연스럽게 하게 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자아성찰,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었다.

 

한국에서는 그저 흘러가는대로 인생의 한 단계가 끝나면 그 다음 단계가 거의 정해져 있었고 원하는 길을 가는 방법도 비교적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교, 대학교를 마치고 취직, 취직해서 일을 하다가 결혼, 결혼 후 육아... 나의 경우에는 커리어를 바꾸기 위해 입사 2년 반 후 퇴사하여 대학원에 진학하였고 대학원을 마치는 시점과 비슷한 시기에 이민을 오게 되었다. 대학원 졸업 후 다시 취업을 해야 할 시점에 삶의 터전을 옮기게 되면서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고, 이 곳에서는 내가 원하는 일을 찾는 것이 지리적으로, 여러 환경적으로 쉽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일 뿐만 아니라 인간관계도 제로 베이스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니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 내가 어떤 사람으로 비춰질지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여기 사람들에게는 내가 동양여자라는 사실 외에는 나의 배경에 대한 상식이 전무하므로 그동안 느껴왔던 스스로의 단점을 개선하고 좀 더 나은 사람이 되어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역시나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사람들을 만날 때 기존 인간관계에서의 실수들을 의도치 않게 여전히 반복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많은 자책을 하곤 했다.

분명한 것은, 낯선 환경과 낯선 문화에 둘러싸여 살면서 분명히 나라는 사람에 대해 한국에 있을 때와는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된다는 점이다. 나의 학벌, 직업, 나이, 사는 곳 등으로 어느 정도 정해져 있던 사회적 지위는 여기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인종이라는 새로운 편견을 감수해야 하지만, 그 외의 모든 것들은 내가 하기 나름이고 누구한테 평가 받을 일도 다른 사람의 눈치 볼 일도 전혀 없다. 이 곳에서 나는 조용히 내가 원하는대로 살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 물론 문화적으로 아직 익숙하지 않아 괜스레 소심해지곤 한다. 한국에서는 나름 떵떵거리며(?) 살았지만 여기서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며 동양계 이민자에 불과하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매우 자유롭다. 화장을 하지 않고 나가도, 츄리닝만 입고 다녀,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고 나도 전혀 쪽팔리지 않는다. 빨간 SUV 타고 다니는 여자지만 전혀 튀는 느낌이 없다.


오늘도 나는 익숙하게 집에서 혼자 하루를 보냈지만 아직도 내가 있는 '집'이라는 공간이 낯설고 그 집이 있는 동네가 낯설다. 아무것도 하는 일 없이 일상이 흘러가는 것 같지만 낯선 공간에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살아 있음을 느끼며 나 자신과의 대화가 늘어남을 느낀다. 빨리 일상이 정리되고 안정되면 좋긴 하겠지만 한편으로는 나에게 주어진 평생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자유 시간을 새로운 나를 발견하고 만들어가는 데 쓸 수 있기를 바란다. 이 시간이 낭비가 아니라 성숙의 시간으로 기억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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