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21일, 인간과 인공지능의 번역 대결이 열렸다. 통번역대학원 출신 5년 이상 경력의 통번역사 4명과 구글, 네이버, 시스트란 번역기가 겨룬 세기의 대결.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직까지는 컴퓨터가 인간에 한참 못미친다"는 평가가 나왔다. 특히나 문학과 같은 '감성'이 들어간 글에 있어서는 인공지능이 내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도 그럴것이, 인공지능 번역은 컴퓨터가 방대한 데이터를 학습하게 하고 이를 데이터베이스로 하여 주어진 문장과 가장 가까운 번역문을 내놓는 방식이기 때문에, 전혀 새로운 내용이나 문학과 같은 창조적 글쓰기, 또는 맥락이 숨겨진 경우에는 제대로 된 번역문을 내놓는 것이 불가능하다. 더구나 한국어와 영어 같이 어순이 완전히 다르고 전혀 유사성이 없는 언어 간 번역인 경우에는 말할 것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번역사라는 직업이 미래에도 끄떡없을 것이라는 얘기는 전혀 아니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에서도 예측한 바 있듯이, 가까운 미래에 번역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번역 작업을 하기 보다는 인공지능이 작업한 결과물을 수정하고 다듬는 일, 번역 프로젝트를 관리하는 일 등을 하는 비중이 늘어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번역의 수요 자체는 계속 늘어날 것이며, 마무리 작업은 여전히 인간의 손을 거쳐야 할 것이라는 점이다. 이번 번역 대결을 지켜본 한 AI 전문업체 관계자도 "AI 번역은 수학의 계산기와 비슷한 의미"이며 "단순 정보를 위해 AI 번역을 쓰는 일과 인간이 저자의 뜻을 생각하며 번역하는 일은 미래에도 명확하게 구분 될 것"임을 인정했다.
과거 통번역사는 모국어와 외국어를 완벽하게 구사하고 한 언어로 표현된 말이나 글의 맥락을 정확히 파악하여 다른 언어로 빠르게 전환하는 능력만으로도 먹고 살 수 있었다. 십여 년 전만 해도 외국어를 잘 한다는 것만으로도 다른 사람의 부러움과 칭송을 한몸에 받았지만, 요즘에는 영어를 비롯해 제 2 외국어까지 필수인 시대인데다가 인공지능의 발달로 통번역사의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지고 있다. 그렇다면 나를 비롯한 기존의 통번역사, 또는 외국어를 좋아해서 업으로 삼고자 하는 사람들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부분에서 알아야 할 사실은 인공지능의 발달로 인간이 하는 통번역 행위의 가치는 줄어들고 있지만, 언어 장벽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이를 낮추기 위한 노력, 즉 언어 산업 자체는 계속해서 성장할 뿐 아니라 더욱 중요해질 것이라는 점이다. 또한 앞으로 언어 산업의 핵심은 외국어 능력 그 자체가 아닌 테크놀로지가 될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이미 선진국 언어 시장에서는 뚜렷이 나타난다. 한국에서 프리랜서로 오랫동안 일을 하지는 않았지만, 미국에 오고 나서 이 쪽 언어 산업에 대해 공부를 하다 보니 한국의 통번역 산업이 얼마나 낙후되어 있는지 알게 되었다.
우선, 한국에는 미국 및 유럽에서와 같은 개념의 LSP(Language Service Providers: 언어서비스 제공자)는 사실상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한다. 생소하게 들리지만 LSP는 결국 흔히 말하는 '통번역 에이전시'와 유사한 역할을 하는 언어 서비스 회사들로 이해하면 된다. 그런데 한국의 이러한 에이전시들과 업계를 선도하는 대형 글로벌 LSP(Lionbridge, Welocalize, LanguageLine Solutions 등)의 다른 점은, 후자는 단순한 통번역 중계자가 아닌 IT 기업을 표방하며 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번역 뿐 아니라 관련 소프트웨어 개발, 로컬라이제이션, 글로벌 마케팅, 컨텐츠 개발 등 기업들이 글로벌 비즈니스를 하는 데에 있어 언어 장벽을 낮추기 위한 총체적인 서비스를 제공한다.
대부분의 프로젝트는 영어를 기반으로 다양한 외국어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으며, 프로젝트 규모가 크고 노하우가 많다보니 프로세스가 체계화되어 있고 번역가들에게 주어지는 지침이나 가이드라인도 명확하다. 또한, 로컬라이제이션 프로젝트는 CAT Tool(Computer-aided Translation Tools)을 사용하여 진행되는 경우가 많아 소프트웨어 스킬은 필수이다. 외국어에서 모국어로의 통번역이 일반적으로, 그 반대가 늘어나는 추세인 한국에 비해서 통번역사의 부담이 적으나 퀄리티는 높고 요율도 전반적으로 높다. 세계적 추세가 이런데도 내가 다니던 통번역대학원에서는 순수한 언어 능력만 강조하고 CAT Tool 활용법 강의는 2년 간 마지막 학기에 일주일에 한시간 할애하여 수박 겉핥기식으로 가르쳐 주는 것이 다였다. 그러면서 교강사들은 점점 낮아지고 있는 요율에 절대로 '타협'해서는 안된다며 졸업 후 현실과 한참 동떨어진 '통대요율'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말처럼 쉽지는 않겠지만 한국 내 통번역사들도 해외로 눈을 돌리고 세계적 추세에 관심을 가지며 IT와 기술, 전문분야를 개척하기 위한 자기계발에 조금이라도 시간을 쏟는다면 훨씬 더 많은 기회가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번역 일은 대부분 이메일과 시스템을 통해 하기 때문에 환율 등의 문제만 현명하게 대처하면 거주지에 상관없이 이론적으로 전세계에서 일감을 수주할 수 있다. 한국 내 번역 수요는 사실 실질적인 부가가치를 전혀 생산하지 않는 '죽은 수요'가 다수를 차지한다. 영어 독해 실력을 갖춘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영한의 경우 내부적으로 필요한 문서인데 읽기가 '귀찮으니까', '시간이 없어서' 번역을 해달라는 요청이 흔하고 한영의 경우에도 내부용 문서인 경우가 많다. 반면, 로컬라이제이션의 경우에는 용도가 분명하고 꼭 필요한 절차로서 앞으로도 글로벌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IT 기업이 늘어나면서 해외 런칭에 필수적인 광의의 언어 산업은 점점 그 규모가 성장하고 다변화할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