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판도 브랜딩이 필요합니다
오늘, 하루도 고생했어. 토닥토닥
퇴근길에 간판 너머로 보이는 네온사인 문구를 보면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그래, 나 오늘 회사에서 업무 쳐내랴 잔소리 들으랴 고생 많이 했으니 와인 한잔 할 자격이 있지.”
스스로를 위로하며 ‘오늘, 와인 한잔’ 매장에 들어선다.
예쁜 네온과 조명이 있는 분위기 좋은 자리에 앉아서 와인을 주문하려는 순간,
나를 어서 선택해달라고 짧은 시구 한 줄씩 가슴에 품고 기다리는 와인들이 작은 책자 안에 가득하다. 메뉴판에 적힌 이곳 와인들의 이름들이다. 와인을 고르기 위해 메뉴북을 훑어보며 각자 자기에게 해당되는 것들을 선택한다. 자, 지금부터는 와인의 맛은 크게 중요하지 않은 듯하다.
난 예쁘니까 ‘넌 예쁘니까’ 와인으로 할래
나는 지금 응원이 필요하니까 ‘너를 응원해’로 하겠어
갓 사귀기 시작한 커플이라면 ‘오늘부터 우리 1일’ 와인을 선택해야 할 것 같다. 와인의 맛도 중요하지만 메뉴를 주문하는 순간부터도 재미와 감동이 있다. 왠지 그 와인을 한잔 마시면 그 이름대로 이루어질 것 같다.
와인바는 너무 비싸서 못 간다는 건 이제는 옛말이 되었다. 비싼 샹들리에와 고급 술잔이 가득한 곳보다 예쁜 조명과 재미있는 문구의 네온사인이 있는 이곳이 더 위로가 되고 편안함을 준다. 20~30대 사회초년생들도 기꺼이 즐길 수 있는 문화가 된 것이다.
나에게 이 브랜드가 눈에 띄었던 것은 단연코 메뉴판이었다.
작은 책자로 되어있는 메뉴판은 마치 한 권의 시집 같다. 최근에 가서 본 것의 표지에는 이미 ‘오늘, 시집’이라는 제목으로 변경되어 있었다. 정기적으로 주제에 따라 책자의 사진과 글이 변경되는 듯한 ‘오늘, 시집’ 메뉴판은 그 계절의 감성을 듬뿍 담고 있었다.
최근에 들렸을 때에는 지난해 늦가을인 2021년 11월 24일 자로 발행한 시집이었다. 주제는 추억이다. 서울, 대전, 대구, 경주, 거창, 순천, 제주 등 도시의 계절을 담는 사진들과 그에 어울리는 추억이 담긴 시가 적혀있다. 그야말로 시집이다. 와인 마시러 왔다가 시를 한 권 읽고 간다.
마음속 추억이 아련하게 떠오른 오늘
메뉴판의 사진을 보며 시구를 읽다 보니 나도 추억 한 구절씩이 떠오른다. 이곳 나도 갔었는데..
친구들과 순천만 습지에 갔었다. 그때는 각자 회사일에 바쁘고 자신의 꿈을 좇느라 바빠서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나는 일을 좋아하고 바빴다. 그때도 어떤 외식 브랜드 론칭을 마무리한 주말, 친구들이 차로 나를 픽업하고는 순천을 향해 냅다 새벽 여행길을 달렸다. 그렇게 달려온 곳, 순천만 습지의 여름은 구름 한 점 없고 내 몸뚱이 하나 가릴 곳 없는 태양 아래 벌판이었다. 초록색의 갈대 벌판, 햇빛이 강력했지만 끝없이 펼쳐진 갈대밭을 보며 왠지 모를 가슴속 뻥 뚫림을 느꼈었다. 그런 순천만 습지의 가을 모습은 이렇구나.. 황금 갈대들이 가득 찬 가을의 순천만, 이제는 각자 가정도 꾸리고 신랑과 애를 보살피며 더 바빠져서 예전처럼 여행을 함께 갈 수 있을까 싶지만, 언제가 함께 또 떠나고 싶다. 그때는 가을의 순천만 습지로 가야지, 그러면 조금도 우리들 마음이 황금 갈대처럼 풍성해지고 넉넉해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본다.
이곳은 저렴한 와인과 음식을 즐길 수 있는 곳이지만 네온사인과 공감의 문구가 만들어주는 분위기와 감성적인 메뉴판을 통해서 아련한 추억과 애틋한 감성을 경험하는 곳이 되었다. ‘오늘, 와인 한잔’은 메뉴판이라는 시집을 통해서 고객에게 전달하고 싶은 브랜드의 철학을 감성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어떠한 서비스나 이벤트보다도 고객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는 시집 한 권을 통해서 편안하고 따뜻한 브랜드임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브랜드의 커뮤니케이션은 오늘, 한잔 공식 인스타그램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예전에는 '오늘 백일장'을 진행했었다. 백일장 이벤트를 통해 좋은 아이디어도 얻지만 고객과 함께 위로가 되는 문구를 통해 소통하고 브랜드의 철학을 나누는 활동을 하는 것이다. 그 후에도 다양한 커뮤니케이션 활동을 통해 브랜드를 알리고자 하는 모습들이 보인다.
월간이나 계간처럼 정기적으로 발행되는 시집이나 잡지들을 기다리는 마음이 이럴까. 다음 주제는 어떤 것일지 다음 시즌의 ‘오늘, 시집’이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