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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맑음 Jan 15. 2021

아이의 눈이 묻고 있었다

그럼 당신은?

가끔 아이들에게 지시를 내려야 할 때

존댓말을 쓰곤 한다.


"이제 정리하고 양치하세요."

"숙제부터 하고 노세요."


멈칫,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엄마 왜 우리한테 존댓말 해요?"라고 묻던 아이들이 이젠 미동도 없다. 엄마의 얇팍한 꼼수를 알아챘기 때문이다.

엄마가 상냥할수록 주문이 많아진다는 것을.


딴엔 내가 들어도 지겨울법한 잔소리, 좀 더 '나이스'하게 해보자는 심산으로 시작한 존댓말이었다.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 동등한 인격체로 존중해주겠다는 각오도 나름 포함돼 있었다. 아이를 높여주면 반대로 고압적이고 위압적인 내 태도가 누그러질 줄 알았다. 지시할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커지는 목소리가 내게도 거슬리게 들리던 터였다.

 

좋은 의도라 여겼고 달리 다른 마음은 없었다. 그런데, 내 존댓말은 효과가 없었다.

내 의도와 호의는 착한 '척'하고 싶었던 엄마의 연기였으므로.  


불현듯 주변인들이 일방적으로 내 마음에 투척했던 가짜 조언들이 떠올랐다. 친한 척, 생각해 주는 척 그들이 흘리고 간 충고들은 과일 맛을 흉내낸 들척지근한 음료수처럼 맛 없고 해로울 뿐이었다. 그런데도 그 말들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고 내 무의식에 엉겨붙어 이따금씩 수면 위로 올라와 똑같은 맛을 재현해내곤 했다. 말이 빚어 낸 끔찍한 기억은 다 자란 마음에도 지독히 유해하다.


'계산된 행동.'

아이들은 기가 막히게 진짜와 가짜를 구별해낸다.

잔소리를 존댓말로 한다고 해서 지겨운 잔소리가 살가운 애정표현이 되는 건 아니다. 존댓말이 마법의 주문처럼 제멋대로인 아이들의 손과 발을 춤추게 할 것이라 여겼던걸까. 어설픈 내 생각과 행동에 뒤늦게 손발이 오그라들었다.

 

나는 어쩌면 자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행동하면 아이들이 따라오겠지,

더 잘 하게 되겠지. 혼자 계산하고 착각하고 오류 투성이인 결론을 들고 제 멋대로 아이들을 조종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엉뚱한 산으로 진격을 외치며 홀로 달려가는 코미디 속 주인공처럼, 나는 매일 누구도 봐주지 않는 희극을 찍고 있는지 모른다.

  

어젯밤. 내일 아침에 하겠다며 숙제를 미루고 낄낄 대며 동영상을 보던 아이에게 참았던 '분노 폭탄'을 터뜨리고 (남편이 제발 짧게 하라는) 일장 연설을 늘어 놓은 뒤 그래도 할 말이 남아 어떻게 한 마디 더 보탤까 궁리하던 내게, 금자 언니가 말씀하셨다.

"너나 잘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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