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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맑음 Jan 14. 2021

새우잠을 자다가

영영 깨어버린 밤

새끼들을 품고 잠들어 있는 어미의 모습엔

사람의 마음을 무장해제 시키는 마력이 있다.


오늘도 자기가 엄마 옆에서 자겠다며 투닥거리는,

이젠 제법 덩치 커진 녀석들의 실랑이를 보며

그 어느 쪽의 손도 들어주지 못해 두 녀석을 양쪽에 끼고 잠든 밤.


까무룩 잠들때까지만 해도 여직 엄마바라기인 녀석들의 모습에 내심 마음 한 켠 뿌듯했는데, 뒤척이는 두 녀석 등쌀에 곱사등 새우처럼 끼어있던 나는 영영 잠에서 깨고 말았다.

 

사내의 등을 닮아가는 첫째의 하얀 어깨가,

엄마젖을 빨듯 입맛을 짭짭 다시는 둘째의 작은 입술이 봐도봐도 질리지 않아 계속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결국, 엄마가 됐구나 싶다.


스스로를 어른이라 칭하는 것조차 낯설고 어색해

나는 어른이 아니라 청춘이다, 스물이다, 서른이다로 칭하곤 했다.

권리는 누리면서도 그 어떤 책임은 피하려 했던 이기적이고 불경했던 나날들.

나처럼, 이토록 미숙하고 불안한 존재가 이 땅의 어른이라서 세상이 이리 돌아가는 것이라고, 내가 저지르지도 않은 죄악들을 보며 속죄의 마음으로 머리 조아렸던 때도 있었다.

늘 자신이 없었고 그래서 힘들었고, 그런 내 모습에 끝내는 더 화가 나 쉽게 폭주하곤했다.


지금도 그 좁디 좁은 마음의 반경에서 헤어나오진 못했지만 그래도 새끼를 보면 품어 안는 내 모습을 보며 나 역시 그 정도의 따뜻함은 갖춘 사람이 된 듯해 안심이 된다.

 

모든 생명의 숙명인 번식이란 과업이 나 같은 '미성숙한 어른'에게 가당키나 한 일일까,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야 뒤늦게 깊은 상념에 빠졌지만 이미 태어난 아이를 도로 무를 수는 없는 일.


그저 나보다 '더 나은 인간'으로 자라나도록, 아이들 인생에 나란  그늘이 지지 않게  매일 애쓸 뿐이다. 훗날 장성한 아이가 부디 들보 같은 내 단점은 버리고 티끌만한 장점은 귀신 같이 닮아 더 나은 삶을 살아가기를. 어미로서 바라는 건 이것뿐이라고 한다면, 이 또한 욕심일테지.

 

새우잠을 자다 깨어 책을 읽다 아이들을 보다 하던 밤, 어느덧 아침이 밝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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