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시 반에 맞춰놓은 알람은 5분 간격으로 기상을 재촉합니다. 저 혼자 자는 것도 아닌 공간에, 계속해서 울리는 알람에 다른 사람들마저 깨어날까 봐 게으름조차 부리지 못하고 잠에서 일어납니다. 도대체 아침 여덟 시 반 투어 예약을 왜 잡았을까 스스로를 원망하면서 비몽사몽 간에 간신히 몸을 씻으러 나갑니다.
찬 물로 정신을 차리며 준비를 끝마치고 건물 밖으로 나가자 뚜렷한 문제를 직면하게 됩니다. 마치 사우나에 있는 것처럼, 들이마시고 내쉬는 숨에서 타오르는 더위를 그대로 느낍니다. 대관절 아침부터 무슨 더위인지 의욕이 꺾여나갑니다. 도대체 오늘 하루는 또 얼마나 끔찍한 날씨가 기다리고 있을지 생각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예보에는 38도까지 올라가는데 그 숫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별로 체감하고 싶지 않은 하루의 시작입니다.
가능한 응달을 찾아다니며 미팅 포인트인 시뇨리아 광장 앞 청동 기마상을 향해 갑니다. 이런 더위에도 많은 사람들이 광장에 모여있는 것이 신기할 따름입니다. 미팅 포인트에 모인 저희 팀은 거의 서른 명 정도로 규모가 꽤 큰 투어입니다. 여느 때처럼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출석체크를 하는데, 대부분 팀원들이 가족끼리 오신 분들입니다. 아니, 출석체크를 마치고 보니 오늘은 홀로 온 여행객이 저 혼자인 모양입니다. 다른 때라면 말동무를 할 홀로 여행객이라도 있었을 텐데, 오늘은 그나마의 말동무 친구마저 찾기 힘들어 보입니다. 가족들끼리 다니는 여행에 이상한 사람이 끼어드는 것을 누가 반길까요? 오늘은 별 수도 없이 그저 가이드 님께 찰싹 붙어서 투어를 떠나기로 합니다.
오늘의 미팅 포인트 시뇨리아 광장. 아침부터 강렬하게 태양이 타오릅니다
생각해보면, 평소에도 혼자 다니는 제가 말동무가 없어졌다고 괜히 아쉬워할 일도 아닐지 모릅니다. 이탈리아에 온 이후로 계속해서 가이드 투어를 다니다 보니 이 나름대로 또 적응을 한 모양입니다. 요 한 달 간은 혼자서 발 가는 대로 돌아다녔습니다만, 이탈리아만큼은 혼자서 돌아다닐 엄두가 잘 나지 않습니다. 치안상으로 불안함을 느낀 부분도 있고, 특히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많이 찾아다니게 되는데 배경 지식이 없다 보니 제대로 감상을 즐기기 어려운 탓도 있습니다. 물론 지금까지도 오디오 가이드나 인터넷의 도움을 받아서 부족한 지식을 채웠습니다만, 거기에 쏟아붓는 정신적 부담을 슬슬 감당하기가 벅찬 나날들입니다. 만약 제가 좋아하는 근현대 역사라면 오기로라도 힘을 내볼 텐데, 특히나 이탈리아 관광의 전반을 차지하는 중세, 르네상스의 미술사는 저 혼자서는 한계가 뚜렷하게 느낍니다. 특히 오늘 가는 우피치 미술관의 경우 더더욱 그렇습니다.
우피치로 가는 길
우피치 미술관에서의 관람은, 솔직히 말해서 매우 고됩니다. 가이드 님이 친절하게 설명해주시는 것은 감사한 일입니다만, 중세 후기부터 르네상스, 매너리즘, 바로크 시대까지 중요한 화가들과 중요한 작품들을 하나하나 욱여넣자니 이미 용량을 초과한 기분입니다. 세 시간 동안 미술관을 열심히 따라다니며 마치 학창 시절의 주입 교육처럼 미술 교과서를 통째 암기하는 기분이랄까요? 그나마 역사적 가치가 있는 실물을 직접 본다는 감격에 억지로 텐션을 유지하며 견뎌봅니다. 이 지겨울 수도 있는 내용을, 다른 분들은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우피치 미술관 내부
고된 시간에 대한 자기 합리화일 수도 있겠지만, 우피치에서의 감상이 지루하기만 한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문외한에 가까운 저조차도 들어본 유명한 작품들은 역시 원본을 직접 만나는 감회가 남다르긴 합니다. 특히 그 유명한 보티첼리의 '봄'은 보면 볼수록 기묘합니다. 광고 등에서 워낙 많이 본 탓에 익숙한 그림입니다만 이렇게 자세히 들여다본 적은 처음입니다. 옷감의 주름과 색감, 질감, 어딘가 비현실적인 표정이 어우러져 신묘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중세에서 바로크까지 신에서 인간 중심으로 변해가는 양식의 변화 역시 이채로운데, 박물관의 끄트머리에 전시된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는 수많은 명작들 중에서도 유독 기억에 남을 겁니다. 바로크 시대 특유의 어두운 배경과 강렬한 빛을 통해 표현된 분노가 캔버스 너머로 적나라하게 다가오는 느낌입니다.
같은 주제를 다루더라도, 중세와 르네상스의 표현은 그 궤가 다른 기분입니다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보티첼리의 '봄'
우연히 보게 된 그림의 뒷면
독특한 느낌의 '우르비노의 비너스'
강렬한 인상이 지워지지 않는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
우피치 미술관 투어를 마치고 나니 다리가 퉁퉁 부은 것처럼 아파옵니다. 어디 앉을 곳도 없이 3시간 동안 서서 설명을 듣는 것은 걸어 다니는 것보다 더 힘이 드는 기분입니다. 조금이라도 쉬면 좋을 텐데 쉴 새도 없이 피렌체 시내투어가 시작됩니다. 그나마 냉방을 해주던 미술관을 나와 강렬한 햇살이 내리쬐는 피렌체의 거리에 강한 현기증이 느껴집니다. 기온을 체크해보니 오전의 예보대로 38도를 넘깁니다. 다리는 아프지 뜨거운 햇살에 눈도 뜨기 힘들지 거리에 사람은 넘쳐서 가이드 님을 따라다니기도 힘들지 아침도 못 먹어서 배는 고프지 미술관에서 너무 많은 이야기를 들어서 두통도 있지 제가 여행을 다니는 건지 생지옥을 걷고 있는 건지 모를 기분입니다.
우피치에서 바라본 베키오 다리와 아르노 강
날이 이렇다 보니, 과연 저만 힘든 게 아닌가 봅니다. 빠르게 끝내고 싶은 절규가 가이드님의 목소리에 묻어 나옵니다. 베키오 다리를 건너갔다가 다시 시뇨리아 광장으로 돌아오는데, 베키오 다리에서 본 아르노 강이 녹조 때문에 시궁창 물처럼 보여 자꾸만 끔찍한 날씨를 상기시킵니다. 어찌어찌 투어의 마지막 종착점인 피렌체 두오모에 도착하는데 이제 눈 앞이 어질어질하여 쓰러질 것만 같습니다. 두오모 광장에서 어제 봤던 사기꾼들이 보이는 그늘 곳곳마다 그림을 깔아 놓는데, 마음 같아선 죄다 찢어버리고 싶은 걸 꾹 참고 그림을 피해 그늘 밖으로 걸어갑니다. 진짜 사람 같지도 않은 악마들입니다.
베키오 다리의 좁은 통로를 넘어서
1층을 비워 요새화가 가능했던 피렌체의 독특한 건축 양식
'냉정과 열정사이'의 바로 그 길
망할 사기꾼 놈들
참교육을 시전하는 할아버지
드디어 도착한 투어의 종착지 두오모
피렌체의 상징, '천국의 문'에서 끝마친 투어
투어를 마치고 나서 더위도 피할 겸 점심을 먹으러 갑니다. 오전에 이렇게 고생을 했으니 맛있는 점심으로 스스로에게 보상하자며 맛집을 찾아봅니다. 시뇨리아 광장 근처에 파니니 맛집이 있어서 사람들이 줄 서서 기다리는 데, 저도 조금 더 인내심을 발휘해보기로 합니다. 줄을 서서 기다리며 굶주린 배를 잡고 파니니 제작 과정을 지켜봅니다. 거대한 고기를 큼직큼직하게 썰어서 빵에 욱여넣는 것이 마초스러운 장인의 손길이 느껴집니다. 저는 인페르노 맛을 하나 주문하는 데, 두툼한 빵 사이에 수육처럼 익힌 돼지고기와 각종 야채, 매운 소스가 들어간 거대한 파니니의 비주얼이 장난이 아닙니다. 고작 5 유로밖에 하지 않는 대왕 파니니로 고기와 야채를 푸짐하게 먹어치우는 참으로 기분 좋은 식사입니다. 다만 빵이 너무 뻑뻑해서 꼭꼭 씹느라 턱이 아프고, 지나치게 짠맛에 결국 그 큰 파니니를 4분의 1 정도 남기고 먹기를 포기합니다. 좀 아쉽기는 합니다만, 이 정도 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식사입니다. 식사의 마무리로 너무 짜게 먹은 입을 젤라토로 입가심을 합니다. 그늘에 앉아 젤라토를 흡입하는데 왜 이탈리아 사람들이 젤라토를 이렇게나 좋아하는지 여실히 느낍니다. 입에 사르르르 녹는 젤라토에 잠시라도 더위를 잊을 수 있다면 그렇게나 행복할 수가 또 없습니다. (특히 진저 맛의 씁쓸한 단맛이 천국 그 자체입니다.)
파니니가 너무 행복해
무려 한글 메뉴판과 젤라또
이제 배도 채웠겠다, 남은 시간엔 두오모 통합권으로 가볼 수 있는 곳을 몇 군데를 더 가보기로 합니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 조토의 종탑입니다. 두오모 성당을 지을 때 조토가 설계해서 같이 짓기 시작했다는 84미터 높이의 종탑은 아래서 올려다봐도 아득하기만 합니다. 꼭 올라가야만 할까 몇 번을 재고해봅니다만 포기하면 인생에 다음 기회는 없을 겁니다. 이를 악물고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고 오르고 또 올라 종탑 꼭대기에 기어코 올라서고야 맙니다. 종탑 꼭대기에 올라 아래를 내다보니, 붉은 지붕으로 뒤덮인 멋진 피렌체 도시의 모습이 눈에 들어옵니다. 종탑과 유일하게 높이를 견줄만한 쿠폴라 돔에서 구경하는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니, 서로 이 더운 날 이 높은 곳까지 올라오는데 수고했다고 눈빛을 교환하며 손을 흔드는 것이,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를 못합니다.
성 죠반니 세례당
조토의 종탑과 인상적인 건축가 조각상
가까이서 보니까 높다...
오르고 오르고 또 올라서...
아찔한 종탑
종탑 정상의 모습
건너편 쿠폴라에서 손을 흔드는 사람들
종탑을 내려오는 계단은 계속 비틀거리기만 합니다. 그냥 다리 힘이 풀려서 그런 줄 알았더니 정말로 더위 때문에 현기증을 일으키고 있는 겁니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로 쓰러질지도 모른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미 한계입니다. 아직 네시 반 밖에 되지 않았지만, 더 이상의 여정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자각합니다. 아쉬운 마음을 곱씹으며 저는 숙소로 돌아오기로 합니다. 숙소까지 돌아오는 길에 15분 정도를 걸어오는데 정말로 한 걸음 한 걸음이 인고의 시간입니다. 간신히 도착한 에어컨이 한가득하리라 기대했던 숙소는, 정전과 함께 완전한 찜통인 상태입니다. 숙소에서 얼굴을 파묻고 눈물만 흐르는 너무나도 끔찍한 날입니다.
내려가는 길조차 그저 유감
정전이 나서 배전반이 열린 호스텔의 참담한 현실
해는 지고, 어떻게든 전기가 돌아와 정신을 차린 저는 일기를 쓰며 하루를 마무리 짓기로 합니다. 복도에 앉아 글을 쓰고 있는 데, 밥을 먹으러 나온 사람들과 여러 이야기들을 하게 됩니다. 터키 사람의 터키 자랑도 듣고, 한국 사람의 인생 푸념도 듣고, 폴란드 사람의 모토바이크 유럽 일주 이야기도 듣습니다. 마트에서 사 온 1.3유로짜리 와인을 나누어 먹으며, 어느덧 민감할 수 있는 정치 이야기까지 나누는 것이 신기할 따름입니다. 여러 의견이 갈리는 대화가 빙글빙글 돌아 돌아온 공통된 화제는 피렌체의 끔찍한 더위입니다. 정말로, 정말로 끔찍한 피렌체의 하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