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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준 May 14. 2020

7월 26일, 54일 차, 피렌체

나만의 안식처를 찾는 피렌체의 하루입니다.

피렌체에서 맞이하는 세 번째 날입니다. 눈을 뜨자마자 지난 며칠을 곰곰이 생각합니다. 사기와 더위에게 원투펀치를 맞고 계속 시달리다가 셧다운 당한 것이 어제의 기억입니다. 지금 제게 필요한 것은 그냥 에어컨이 나오는 시원한 방에서 시원한 음료를 마시며 빈둥거리는 하루를 보내는 겁니다. 도대체 어떤 욕심으로 "오전에는 피사 탐방, 오후에는 피렌체의 쿠폴라 돔 등반, 밤에는 리옹으로 출발"이라는 끔찍한 일정을 세웠는지 기가 찰 노릇입니다. 저는 당장에 쓰러질 것 같은 일정을 때려치우기로 합니다. 당장에 부킹닷컴으로 들어가서 가성비 좋은 피렌체 호텔을 찾아보기 시작합니다. 다행히 괜찮아 보이는 호텔을 찾아서 2박 정도 피렌체에서의 체류를 연정하고 숨을 돌리기로 합니다.


새롭게 찾은 호텔 방으로 옮길 생각을 하니 아침이 조금 신이 납니다. 들뜬 기분으로 재빨리 짐을 싸고 호스텔을 탈출하려는 순간, 흥을 깨는 꾸중 소리가 들려옵니다. 바로 같이 방을 쓰는 이탈리아 할아버지의 열변입니다.


분명히 전날 저녁에 들은 꾸중 소리와 같은 소리입니다. 전날 힘든 일정을 마치고 방에 들어왔을 때, 할아버지께서 샤워 중이시길래 나중에 씻으려고 일단 방문을 닫고 나갔는데 갑자기 저한테 소리를 치시는 겁니다. 제가 꾸중을 들어도 무슨 소린지 몰라서 어리벙벙해하자 자신이 샤워 중일 땐 문을 잠그지 말라는 듯이, 열쇠 구멍에 대고 뭐라고 소리치셨던, 유쾌하지 않은 전날의 기억입니다. 호스텔에서는 보안 상의 이유로 방을 들락날락할 땐 문을 잠그는 것이 원칙인데도 저한테 소리를 지르는 이유를 당최 알 수가 없습니다. 오늘만 해도 체크아웃을 위해 방 문을 닫고 나가려는 데, 같은 이유로 저를 혼내는 모양입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이탈리아 어를 뒤로하고 저는 이 지긋지긋한 공간에서 사라지기로 합니다. 당분간 호텔에 묵으면 적어도 사람에 시달릴 일은 없을 겁니다.


이번에 새로 잡은 방은 피렌체 중심인 두오모의 바로 옆에 위치한 방입니다. 분명히 가성비 좋은 호텔 방을 찾았는데 위치가 이렇게 좋을 수 있나 반신반의하며 찾아간 호텔은 조금 신기한 장소입니다. 바로 피렌체 전통적인 방식으로 지어진 건물을 호텔로 개조한 곳입니다. 


피렌체에는 아직도 전통적인 방식으로 건축된 건물들이 그대로 사용 중인 경우가 많습니다. 당장 거리를 둘러봐도 탑 형식으로 지어진 4~5층 건물들이 따박따박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수 백 년 전에 지은 것을 아직까지도 그대로 활용하고 있다는 점은 제 입장에선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지은 지 몇십 년만 돼도 재개발하고 다시 짓기를 반복하는 것만 봐온 저로선 몇 백 년 된 건물을 보수만 하고 계속 쓴다는 건 생소할 따름입니다. 


다만 옛 건물이다 보니 몇 가지 아쉬운 점들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4층에 위치한 호텔에 엘리베이터가 없다는 점입니다. 아무래도 건물 구조상 엘리베이터를 설치할 수가 없는 모양입니다. 0층에서 4층까지 그 무거운 캐리어를 들고 빙글빙글 돌면서 계단을 올라가려니 이렇게 푹푹 찌는 날에 무슨 중노동일까요? 벅찬 일정과 호스텔을 벗어나 드디어 혼자만의 낙원인 호텔에 도착하나 싶었는데, 행복한 하루의 대가가 마냥 싸지만은 않은가 봅니다. 


헉헉거리며 프런트에 도착하니, 조금 퉁명스러운 안내인이 체크인을 시켜줍니다. 배정받은 방을 둘러보니 방수용 커튼벽이 설치된 샤워 부스, 세면대, 책상, 침대가 하나씩 있는 미니멀리즘에 충실한 올인원 패키지 원룸입니다. 변기가 들어올 공간이 없어서 화장실을 공용으로 써야 하긴 하지만 더 이상 자고 일어날 때, 씻을 때 누구 눈치도 볼 필요 없는 천국 같은 방입니다. 무엇보다 이 더운 날씨에 에어컨도 마음껏 사용할 수 있습니다. 당장에 에어컨을 켜고 침대에 푹 쓰러져봅니다.

일종의 타워의 역할을 하는 독특한 양식의 피렌체 건축 양식
계단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요.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어놓은 방에서 뒹굴거리면서 시간을 보낸다는 것 행복한 일입니다. 이렇게 행복한 게으름으로 하루를 채우고 싶습니다만 금방 다시 나가봐야 할 시간입니다. 하루 중에 가장 온도가 올라간다는 오후 세 시 반, 바로 이 시간에 쿠폴라 돔 예약이 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굳이 그 시간에 예약을 잡았어야 했나 원망스러울 따름입니다. 그렇다고 피렌체의 상징인 쿠폴라를 안 가볼 수도 없는 일이라, 애써 마음을 달래며 방 밖으로 나와봅니다.

쿠폴라는 예약을 빡빡하게 하여 30분마다 매우 적은 인원만 올라가도록 제한하고 있는데 올라가 보면 그 이유를 납득할만합니다. 쿠폴라로 올라가는 길은 좁고 경사가 심한 데다 올라오는 길과 내려오는 길이 같기 때문에 통행이 매우 불편합니다. 올라오는 사람과 내려오는 사람이 마주치면 한 사람이 벽 쪽에 붙어 다른 사람이 지나가길 기다려야 합니다. 만약에 인원 제한이 없다면 사람들끼리 통로에 얽히고설켜서 정체가 일어나거나 큰 사고가 날 가능성이 높을 겁니다. 특히나 이렇게 더운 날에 좁은 통로에 사람들끼리 엉겨서 오도 가도 못하고 끼여 있을 걸 생각하니 소름이 돋습니다.

성당을 출입할 때에는 항상 소지 금지 물품을 확인합시다. 특히 면도칼이나 스위스 아미 나이프 등의 소지품에 유의해주세요
피렌체 두오모 건축에 큰 역할을 한 아르놀포 디 캄비오(좌)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우)
쿠폴라에 올라가는 길
두오모 천장화를 좀 더 가까이서 볼 수 있습니다
올라가는 길에 낙서를 하시면 안 됩니다
아찔한 경사의 올라가는 길
드디어 골이 보입니다

쿠폴라에 올라가면 두 가지 볼거리가 있습니다. 쿠폴라에서 조토의 종탑을 바라보면 종탑 옥상에 올라와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쿠폴라와 조토의 종탑이 피렌체에서 유일하게 솟아 있는 건물이다 보니 이렇게 올라서 마주 보는 기분은 남다르기만 합니다. 멀찍이서 주고받는 눈빛에서 고생 끝에 등반한 동지애가 느껴지는 기분입니다. 둘의 차이를 이야기하자면, 쿠폴라가 조토의 종탑보다 좋은 것이, 높이가 더 높고 철망이 없기 때문에 마을 전경의 사진을 찍기 더 좋다는 점입니다.

피렌체 전경의 모습
조토의 종탑과 한숨을 돌리고
그렇게 높아 보였던 조토의 종탑도 쿠폴라에서 보면 살짝 초라해 보입니다
그렇게 쿠폴라 옥상에서 SNS용 사진도 좀 찍어보고

볼거리 또 하나는 돔으로 올라가는 길에 볼 수 있는, 위에서 내려다본 성당 내부의 모습입니다. 성당 지상에서 봤을 땐 밋밋하게 보였던 구도가 천장 가까이서 보니까 십자가의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성당을 지을 때는 하느님의 시점을 생각하여 하늘에서 내려다 본모습도 염두하고 짓는다고 하는데, 천장에서 그 구도를 직접 내려보며 실제로 이런 점까지 설계했다는 점에 혀를 내두릅니다.

위에서 내려다본 성당 내부의 모습

쿠폴라를 구경하고 지상에 내려오니 온 몸이 땀으로 흥건합니다. 하루 종일 편하게 쉬자는 계획은 이미 그른 모양입니다. 저녁까지 시간도 조금 남았고, 기왕 땀을 흘렸으니 한 곳 정도는 더 둘러보기로 합니다. 오늘이 실질적으로 피렌체에서의 마지막 날이므로 신중하게 가볼 곳을 정해 보기로 합니다. 많고 많은 미술관 중에서도 가장 인지도가 있는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가보기로 합니다. 


두오모 성당 정도는 아니지만 아카데미아 미술관의 입장을 기다리는 길도 제법 길게 늘어서 있습니다. 특히 인도가 좁다 보니 줄이 더더욱 길어 보입니다. 30분 정도 줄을 선 끝에야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들어옵니다. 사람들이 이렇게나 아카데미아에 몰리는 이유는 바로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 원본을 보기 위함입니다. 그다지 크지 않은 미술관은 빠르게 돌면 10분이면 다 둘러볼 정도로 작은데, 그 한가운데선 다비드 상이 매끈한 곡선을 뽐내고 있습니다. 그동안 많은 곳에서 다비드 상을 봐왔기에 사람만 한 동상인 줄 알았는데 원본은 키가 3미터는 돼 보입니다. 바글바글한 사람들을 피해서 멀리서만 봐도 콘트라포스토 포즈 특유의 인체미가 돋보입니다. 가까이서 보니 잔근육과 손등의 핏줄까지 섬세하게 보입니다. 인터넷으로 찾아볼 수 있는 요즘 세상에 굳이 돈과 시간을 들여 실물을 볼 필요가 있을까 생각했던 적도 있지만, 그런 이야기를 하는 친구가 있다면 언제 가는 같이 한번 와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충분히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아줄 겁니다.

아카데미아 미술관으로 가는 줄
멀찍이서도 위용을 뽐내는 다비드 상
거대한 스케일과 섬세한 디테일에 또 놀랍니다

하루 일정을 마친 다음에 간단히 먹을 것을 싸들고 저만의 천국으로 돌아옵니다. 피렌체 곳곳에서 널린 아시안 가게에서 어렵지 않게 컵라면 하나를 공수해옵니다. 방에 있는 커피포트로 끓여 먹는 불닭볶음면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루 휴식을 선언해놓고 그래도 열심히 돌아다녔다는 뿌듯함이 하루 놀았다는 죄책감마저 덜어주는 행복한 피렌체의 하루입니다.

조금 낯선 향기가 느껴지는 한국 식재료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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