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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준 Jun 13. 2020

7월 29일, 57일 차, 리옹

천신만고 끝에 도달한 리옹입니다

2019년 7월 29일, 밀라노에서의 좌절스러운 하루가 지나가고 아침이 밝아 옵니다. 기차표 예매를 하루 잘못하여 밀라노에서 오도 가도 못하게 되고, 밀라노를 탈출하기 위해서 부단하게 움직일수록 일이 꼬여서는 끝내 멘탈이 박살나버린 채, 전날 밤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습니다. 인터넷마저 끊긴 것을 확인한 후론 옷도 벗지 않고 정리도 하지 않고 씻지도 않고 저녁마저 굶은 채로 호스텔 침대에 쥐 죽은 듯이 누워있었습니다. 도무지 침대 밖을 벗어나기 싫어 오지도 않는 잠을 억지로 청하다가 너무 많은 잠에 머리가 깨질 것 같아 침대를 벗어나기로 합니다. 일어나니 아직도 이른 아침입니다. 머리가 찌뿌듯하고 속이 울렁거립니다. 마치 제 부서진 멘탈을 여실히 보여주듯이 몸도 엉망진창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침대에 15시간을 누워 있었으니 몸이 고통스러워하는 것도 당연스러운 일입니다. 하여튼 머리를 부여잡고 오늘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상기해봅니다.


일단 어제자로 끊겨버린 인터넷을 살려야 합니다. 온라인으로 선불 유심칩의 데이터를 충전하는 것이 불가능해진 이상 오프라인 대리점서 새로 선불 유심 칩을 구매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숙소 와이파이를 이용하여 구글 맵으로 밀라노의 보다폰(통신사) 대리점들을 찾아봅니다만, 별점들이 하나같이 밑바닥입니다. 음식점도 평가가 개차반을 쳐야 별점이 2점대가 나오는데 열 몇 곳에 달하는 대리점들 중에서 별점 3점을 넘는 곳이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의 후기들도 1점으로 도배되어서는 불친절하다거나 사기를 쳤다는 내용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웬만한 상황에선 절대 이런 곳들을 이용하지 않겠지만 당장에 발등에 불을 꺼야 하기 때문에, 그나마 점수가 가장 높은 밀라노 첸트랄레 역의 대리점에서 구매하기로 합니다. 어차피 기차를 타려면 역으로 가야 하니 겸사겸사 유심 문제를 해결하는 셈 치기로 합니다. 혹시나 유심칩 구매에 실패하는 경우를 대비하여 리옹으로 가는 길과 숙소 위치, 기차 티켓들을 스크린샷으로 폰에 저장해 둡니다. 인터넷이 끊긴 상태로 숙소를 출발하려니 영 불안한 것이 아닙니다.


다시 돌아온 밀라노 첸트랄레 역을 보니 신물이 올라옵니다. 도대체 여길 몇 번을 방문하는지 모릅니다. 역에 들어서자마자 지끈거리는 머리를 애써 무시하고 보다폰 매장부터 빨리 찾아봅니다. 다행히 붉은색 간판이 눈에 띄어서 어렵지 않게 찾아냅니다. 작은 대리점에 직원이 두 명 밖에 없지만 사람이 많지 않아서 다행히 처리도 금방 끝날 것 같습니다.

이제 신물이 나는 밀라노 첸트랄레
찾았다 보다폰(vodafone) 매장


대리점 직원에게 말을 거니 이탈리아어 억양이 인상적인 영어로 화답합니다. 영어로 이야기하는 것은 분명한데 발음도 어렵고 직원이 떠듬떠듬 이야기하는지라 알아듣기가 힘들어 몇 번을 되물어봅니다. 대충 제가 이해하기로는 제가 가능한 옵션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한 달 25 기가에 40 유로 선불이고 다른 하나는 8 기가에 30 유로 상품이라고 합니다. 저는 한 달 동안 딱 3 기가만 필요하고 그렇게 비싼 제품들은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하니 그런 옵션은 취급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분명히 보다폰 홈페이지에선 다양한 옵션들을 제공한다고 설명해두어서 미리 확인하고 간 것인데, 오프라인 대리점이라 취급을 하지 않는 건지, 비싸게 한 건 팔아 치우려는 건지 의심스럽기만 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작업하는 것을 옆에서 보니 기본 상품에다가 인터넷을 추가 충전하는 것이 뻔하게 보입니다. 괜히 시비 걸리고 복잡해지면 여행이 더 망가질 것 같아서 그냥 못 본채 하기로 합니다. 한 달 동안 8기가나 쓸 일은 없겠지만 여유 넘치게 샀으니, 앞으로 남은 여행 동안엔 영상통화도 하고 인터넷을 좀 더 펑펑 쓴다는 생각으로 다니기로 합니다.

어플리케이션 이탈리아어밖에 지원 안하는 거 실화인가요?

걱정거리 하나를 해치우고 나니 슬슬 점심을 먹을 시간입니다만, 도무지 식사가 땡기지를 않습니다. 무언가 먹으면 토할 것 같은 느낌이 살짝 듭니다. 그래도 여섯 시간 정도 기차를 타야 하니 지금 먹지 않으면 정말 오늘 하루 종일 굶게 될 겁니다. 최대한 담백하게 먹으려고 식당을 찾아봅니다만 적당한 식당이 없어 버거킹에서 가벼운 메뉴를 먹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점심을 먹으니 헛구역질이 올라옵니다. 계속 배도 아픈 것이 소화불량인지 체를 한 건지 속이 너무 좋지를 않습니다.


밀라노에서 제네바로, 다시 쿨로츠로, 그리고 리옹으로 가는 기차 여행길은, 역시나 멀미와의 전쟁입니다. 원래는 기차를 타고 가는 비는 시간만큼 글이라도 쓰면서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습니다만 멀미가 너무 심해 도저히 타이핑을 할 엄두가 나질 않습니다. 지금 이대로 활자를 읽었다간 그대로 쏟아버릴 것 같아서 태블릿을 접고 눈을 감고 시간을 보냅니다. 멀미에 취해 반쯤 잠든 상태로 어떻게든 시간을 흘립니다만, 그나마도 입국심사를 위해 경찰관들이 잠을 깨우면서 무용지물이 됩니다. 입국 심사관들이 다른 사람들의 짐은 가방과 캐리어까지 체크하는 데 제 짐은 하나도 체크하지 않는 것이 신경 쓰이지만, 당장에 멀미 기운 때문에 더 생각할 여력이 없습니다. 내용물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걸 억지로 달래 가며 어떻게든 리옹에 도착합니다.

제 1 경유지 제네바
제 2 경유지 쿨로츠

기차역에 내려서 크게 심호흡을 합니다. 햇볕은 뜨겁습니다만 신선한 공기를 들이켜니 기분이 조금 나아집니다. 아침에 숙소를 떠나서 별 거 하지 않았는데 벌써 저녁시간입니다. 하루 종일 멀미와 사투를 벌이느라 지친 몸을 이끌고 리옹 시내를 걷습니다. 지하철을 타고 가면 숙소까지 금방입니다만, 지금 상태로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지하철을 탄다는 건 상상도 하기 싫습니다.

드디어 도착한 리옹


리옹 시내를 걷다 보니 프랑크푸르트에 첫 발을 딛던 날의 기억이 떠오릅니다. 유럽에 도착한 첫날 마인강을 따라 걸으며 느꼈던 낯설면서도 정갈한 도시 풍경에 '이것이 바로 유럽이구나'하고 느꼈던 그 설렘이 오래간만에 다시 찾아온 기분입니다. 사람이 많고 복잡하고 투박하고 다소 더럽게 느껴졌던 이탈리아의 풍경을 지나 깔끔하고 잘 정돈되고 여유로운 리옹의 모습을 보니 작은 컬처쇼크를 느낍니다. 거리를 거닐며 누그러지는 마음에 이탈리아에서의 삽질과 고통도 조금은 잊을 수 있을 것 같은 리옹의 하루입니다.

리옹의 시내 풍경들
드디어 호스텔에 도착. 정말 힘겨웠던 리옹으로의 여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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