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종일 혼란스러운 도시 파리입니다
아침을 알리는 시계 소리에 비몽사몽 잠에서 깹니다. 아직 덜 깬 잠에 눈을 비비적 거리며 시계를 들여다보고 깜짝 놀랍니다. 분명 7시 반에 맞춰놓은 알람은 온데간데없고 시간은 9시가 넘어가 있습니다. 온라인 예매를 안 했기 때문에 오늘의 목적지인 루브르에 입장하려면 아침 일찍부터 줄을 서고 기다려야 하는데, 그만 뻗고 자버린 겁니다. 자책감에 애써 무시하며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정신을 차려보기로 합니다. 아마도 어제 야경을 보고 늦게 돌아온 것이 늦잠의 원인인가 봅니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조금이라도 서두르기 위해서 분주하게 움직이는데 반대편 침대에 누워있던 사람이 조용히 하라고 버럭 짜증을 냅니다. 제 아래 침대에 누워있던 사람은 마치 무슨 구경거리가 난 것처럼 저를 계속 뚫어져라 쳐다봅니다. 씻으려면 캐리어도 열고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날 수밖에 없는데 아침부터 짜증을 내니 기분이 확 상해버립니다. 저도 소리에 민감한 편이라 항상 조용히 하려고 노력하는데, 그 정도 소리에도 이런 식으로 짜증을 내고 화를 낼 거면 호스텔에 묵으면 안 되는 게 아닐까요? 짜증도 나고 겁도 좀 나고 도망가듯이 숙소를 나옵니다.
아침부터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누그러뜨리고 루브르를 향해 출발합니다. 루브르는 파리의 중심지인 1구의 중앙에 위치하는데 제가 있는 14 지구에선 거리가 좀 멉니다. 걷는 시간이 길어서인지 다행히 기분은 금세 누그러듭니다. 한참을 걷다 보니 센 강을 끼고 길게 늘어선 루브르가 보입니다. 그런데 이번엔 강을 건너가는 다리에서 서명을 받는 무리 몇이 보입니다. 베를린에서 이미 경험이 있었던 저는 단박에 서명 사기단인걸 알아봅니다. 중간에 서명 사기단에게 잡혀서 서명을 하는 사람들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냥 지나치기로 합니다.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길을 막아서며 들러붙는 게 아닌가요? 잠시 고민을 하고는, 그냥 영어를 모르는 사람인 것처럼 한국어로 적당히 대화를 해봅니다. 제가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니까 사기꾼들도 곧바로 포기하고 다른 타깃을 찾으러 갑니다. 뒤돌아서 떠나는 와중에도 무리 중 한 명이 '아리가또'라고 외치며 일본 사람이냐고 묻는 모습이 조금 우습게 느껴집니다.
센 강을 건너 몇 개의 구역을 통과하니 루브르의 그 유명한 유리 피라미드가 보입니다. 피라미드 앞 넓은 공터에서는 사람들이 저마다 피라미드의 꼭대기를 손으로 집는 사진을 찍고 있습니다. 다들 찍는 컨셉 샷이니 저도 한 장 찍어볼까 생각해봅니다만 흥미가 들지 않아 곧 그만둡니다. 루브르에 오면서 아직 루브르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머릿속에 정리가 되지 않은 이유가 큰 탓입니다. 루브르가 약탈품으로 구성된 박물관이라는 생각이 깊게 자리 잡다 보니, 침략의 전리품들을 대하는 데 있어 저는 피지배자들에게 경의를 표해야 한다는 엄숙함이 밀려옵니다. 자연스레 기분이 가라앉아 사진을 찍는 것도 꺼려지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여하튼, 그런 기분으로 제가 온 걸 어떻게 알았는지, 현장에서 표를 구할 수 없다는 안내원의 충격적인 답변을 받습니다. 현장에서는 표를 팔지 않고 온라인에서만 구입할 수 있도록 정책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생각하면서 티켓 오피스를 찾아보지만 찾을 수가 없어서 금방 포기하기로 합니다. 미리 준비하지 않은 스스로를 탓하며 바로 그 자리에서 내일 모래, 8월 3일 오전 9시 반 표를 예매해버립니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뙬르히 가든이 보입니다. 중앙에 곧게 뻗은 길 좌우로 잔디밭과 각종 동상들이 세워져 있어 시야가 시원시원하고 조형미가 돋보입니다. 산책 나온 사람들도 많아서 사람들이나 구경하며 정원을 거닐기로 합니다. 정원에 스프링클러가 돌아가는데, 흩날리는 물에 뛰어들어 난리를 치는 개들을 보니 기분이 좀 풀어집니다.
그대로 정원을 계속 걸어 루이 16세와 앙투아네트가 처형당했다는 콩코르드 광장을 잠시 구경하고는, 샹젤리제 거리를 따라 한 시간 정도 곧게 뻗은 길을 따라갑니다. 아름답다는 성과는 달리 북적거리는 차와 흙먼지가 날리는 길이란 인상만 강하게 듭니다. 다만 걷는 길에 걸리적거리는 것이 없어서 생각하면서 산책하기 좋은 거리랄까요?
샹젤리제 거리를 따라 도달한 에투알 개선문은, 멀찍이서 다가오면서 봐도 감탄이 나옵니다. 지금까지 제법 많은 개선문들을 봐왔지만 그중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문입니다. 열두 거리가 모이는 로터리 한가운데 세워져 있어, 개선문으로부터 사방으로 길이 뻗어나가는 형상이라 개선문에 광채가 깃드는 기분입니다. 개선문 가까이로 와보니, 문 너머로 보이는 샹젤리제 거리와 푸른 하늘의 풍경이 정말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나폴레옹과 드골이 여기서 승전보를 알렸다는데 그 풍경이 얼마나 대단했을지 지레짐작해봅니다.
개선문 구경을 마치고는, 별다른 예정도 없어 숙소인 14 지구로 돌아오는 길에 보이는 관광명소에 들러보기로 합니다. 관광명소로 박물관을 찾아보니 정말 다양한 박물관들이 보이는데 그중에서도 현대 예술품을 보고 싶어서, 팔레 드 도쿄라는 미술관으로 향하기로 합니다. 추상적인 이미지들의 나열을 기대하고 마음 편히 관람을 시작했지만, 저는 곧 후회 아닌 후회를 하게 됩니다. 전시된 작품들은 생각보다 더 전위적이고 자극적으로. 성적 표현과 인간의 내장, 유혈과 배설물까지 적나라하게 뒤섞고 뒤흔들어서는 관람을 하다가 거의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습니다. 괴기와 공포가 박물관 전체를 뒤덮고만 있는 것 같습니다.
그나마의 배려(?)로 중간중간에 청소년들이나 예민한 사람에겐 혐오감을 줄 수 있다는 문구와 함께 그런 사람들을 위한 탈출구가 따로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탈출구를 따라서 나온 장소가 이번엔 박물관 내 공사장 한복판이라 탈출구마저 전시물의 일종인지 그냥 공사 공간인지 헷갈릴 지경입니다. 괴상한 전시물들로 가득 찬 어떤 공간엔 코카콜라 냉장고와 함께 카운터에 한 사람이 마네킹처럼 앉아 있는데, 이게 전부 전시물인지 아니면 그냥 레스토랑인지 도무지 구분이 안됩니다. 어떤 공간엔 쓰레기통이 전시되어 있는데, 안에 버려진 쓰레기들이 손님들이 버린 건지 아니면 그냥 전시할 때부터 있었던 전시 작품들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비밀의 방 같은 공간에 외부에서 볼 수 없는 전시대가 있는데, 그 전시대 위에 올려진 분홍색 실뭉치가 원래 있던 전시물인지 도무지 알 방법이 없습니다. 혹시 지나가는 관객이 올려놓은 걸까요? 제가 실뭉치를 건드려 헝클어뜨리거나, 아니
면 아예 가져가거나 다른 물건을 올려놓는다면 완전히 다른 전시가 되는 걸까요? 모든 것이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온갖 이미지들에게 폭격당한 정신을 끌고 미술관을 간신히 탈출합니다. 이제 무엇에 대한 생각도 없이 무작정 에펠탑으로 걸어갑니다. 파리 시내를 돌아다니며 어디서든 보였던 에펠탑을 가까이에서 보니, 처음 에펠탑을 지을 때 사람들이 반대했었다는 이야기가 문득 떠오릅니다. 철제 구조물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에펠탑은, 흉물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고 생각이 들 정도로 기계적인 느낌이 듭니다. 차가운 철제 구조물들이 얽히고설킨 기계 제국의 승전보를 울리는 상징물 같달까요? 19세기 말 사람들이 산업시대에 대해 가졌던 이상적인 이미지를 명징하게 보여주는 구조물일 겁니다.
철제 구조물 사이사이로 리프트 카를 타고 올라가는 사람들과 계단을 타고 걸어 올라가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어제 몽파르나스 타워에서 본 파리의 전경이 있어서 굳이 탑에서 시내 전경이 궁금하지는 않습니다만, 철제 구조물 사이사이의 내부가 어떤 모습일지 매우 흥미가 듭니다. 이미 하루 종일 걸어 다니느라 다리가 아프기는 하지만, 에펠탑을 직접 두 발로 걸어 올라가기 봅니다. 대기 시간에만 한 시간 가량을 기다려 보안 검색대까지 통과하고서야 에펠탑 등반을 시작하는데, 꼭 어렸을 때 정글짐을 타는 기분입니다. 걸어서 올라가는 통로는 옥상까진 올라가지 못하고 1층, 2층까지 올라갈 수 있는데 생각만큼 높지는 않습니다. 철제 구조물 사이로 보이는 파리의 풍경 속엔 사람들이 자그마하게 눈에 들어와 인간미가 느껴지는 풍경입니다. 비록 힘들지만 에펠탑을 오르며 본 풍경들은 잊기 힘든 추억이 될 겁니다.
에펠탑 구경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은 자전거를 타고 돌아옵니다. 에펠탑에서 바라본 마르스 광장을 건너 5km를 타고 나서야 겨우 호스텔에 돌아옵니다. 방에 들어오니 오전에 저를 뚫어져라 쳐다보시던 분이 방에 계시길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사실은 저를 바라봤던 것이 아니라 좁은 공간에서 기도를 드리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이야기하십니다. 제게 신경질을 냈던 청년도 제게 화가 났던 건 아니고 조금 미안해한다는 이야기도 겸사겸사 듣습니다. 조금 힘들게 시작했지만 잘 마무리를 짓는 파리의 하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