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무겁게 내려앉은 색깔의 향연, 프랑크푸르트와 하이델베르크
2018.7.14~18 독일 프랑크푸르트, 하이델베르크, 로텐부르크, 베를린 여행기
인터라켄 서역에서 기차를 타고 오늘은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갑니다. 바젤 역에서 환승을 해야 했는데, 화장실이 급해 종종걸음으로 헤매 다녔습니다. 드디어 공중화장실 발견! 유료였습니다. 1프랑이면 기꺼이 지불하려 했는데, 2프랑이랍니다. 남은 동전이 없어 어떡하지 거의 눈물을 흘릴 뻔하다가 머릿속의 전구가 반짝입니다. ‘기차에 화장실 있지 않나?’ 빠르게 뛰어 기차에 올라탔습니다. 이윽고 찾은 화장실. 예쓰! 그렇게 무료로 급한 볼 일을 해결하고 평온해질 수 있었습니다. 바젤에서 출발한 기차가 독일 경계선을 넘자마자 3G가 잘 터지기 시작합니다. 스위스에서는 도대체 뭐가 문제였던 걸까. 아무튼 드디어 노래를 들으며 창밖을 즐길 수 있게 되어 행복해졌습니다. 잔잔한 에메랄드빛 호수에서 드넓은 대지로 서서히 풍경이 변하면서 국경을 넘었구나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한참 그렇게 가고 있는데 카톡으로 손편지가 도착했습니다. 여행 오기 한 2주 전쯤 더블린에서 한국에 있는 지인에게 엽서를 보냈었는데, 그가 답장을 보낸 것이지요. 첫 장을 읽는데 그 조용한 기차 안에서 푸하하 소리 내 웃어버렸습니다. ‘분에 넘치는 영광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정말이지 전라남도 영광입니다.’ 지극히 그 다운 농담으로 맺어진 편지. 어릴 때는, 생각보다 평탄하게 지속되지 않는 인간관계 때문에 끙끙 앓았던 적이 많았습니다. 내가 이만큼 가깝다고 생각하는 이에게 나는 꽤 사소한 존재구나 상처를 받고는 나도 이제 그를 딱 그만큼만 대해야겠다 유치한 다짐을 했던 일들. 생각해보면 그 상처는 타인이 준 게 아니라, 스스로를 괴롭혀 만들어 낸 것인데 말이지요. 관계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모든 관계의 중심에 '나'를 두기 시작하니 편해집니다. 이 지인과는 딱 그런 관계. 나는 이 사람을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일까?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는 얕은 관계.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근근이 지속되고 있는 관계. 재미있습니다. 계속 이렇게만 이어졌으면.
장장 6시간 후 프랑크푸르트 역 도착. 역사가 엄청나게 컸습니다. 내려서는 내일 갈 하이델베르크 버스 티켓을 구매하기 위해 플릭스 버스 사무실을 찾아갔습니다. 현지 발매는 €3가 더 비싸답니다. 온라인 예매를 하고 싶었지만 표를 출력하기도 애매해서 그냥 그 자리에서 표를 사버렸지요.(그러니 여러분은 온라인으로 예매하시고 €3 아끼시길..) 호텔은 역 바로 옆에 있었습니다. 체크인을 하며 웰컴 선물로 와인 한 병과 물 한 병을 받고 드디어 입실 완료. 호텔은 마치 한국의 모텔 방 같았습니다. 깔끔한 시설에 마음을 놓고 지친 몸을 잠깐 쉬게 해 주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뢰머 광장을 중심으로 시내를 거닙니다. 현대를 대변하는 듯한 높은 빌딩들과 옛 전통을 대변하는 것 같은 고전적인 독일의 건물들이 조화를 이루는 도시. 유럽식 집에 익숙해진 탓인지 거대한 빌딩들을 보며 우와 감탄을 뱉습니다. 스위스에 있다가 와서인지, 거리가 조금 지저분해 보이기는 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배가 조금 고파져 소시지를 먹었습니다. 서버가 “Beer?”하고 저를 유혹합니다. 하지만 방에 와인이 있기에 “No thank you” 힘들게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돌아오는 탄식. “Why? Beer is always good.” 하하. 당신 마음 나도 잘 알아요. 내일부터는 많이 마실 테니 독촉하지 마세요. 웃음으로 답변했지요. 호텔로 돌아왔더니 갑자기 동행인을 잃게 된 나를 알아채고는 온갖 피로함이 몰려들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순간에 바로 잠들어버렸습니다.
다음 날은 어슬렁어슬렁 일어나 기차역에서 눈여겨봐 둔 프레첼 하나를 사들고 프랑크푸르트를 조금 더 둘러보다가 스타벅스에서 12시가 되기를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하이델베르크로 가는 버스를 타고 2시가 다 되어 도착. 다행히 하이델베르크 성까지 오르는 버스도 금방 탑승했지요. 오르막길을 올라 성에 다다르니 마을 전체 풍경이 아주 잘 보입니다. 독일 고성은 이런 분위기를 가졌구나. 모든 색깔들이 무겁게 가라앉은 느낌. 이런 곳을 매일 거닐었을 성주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렇게 아름다운 마을이 내 소유라며 어깨에 한껏 힘이 들어갔을까. 아니면 이토록 아름답기에 무거운 색깔만큼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을까. 구경을 마치고 친구가 추천해준 맥주집으로 향했습니다. 트립어드바이저를 참고하여 이 펍에서 직접 만든다는 Wheat 맥주와 슈바인스학세를 주문. 맥주를 마시고는 독일은 확실히 맥주에 자부심을 가져도 되는 곳이구나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슈바인스학세는 조금 짠 것만 빼고는 정말 맛있었습니다. 잘 구워진 콜라겐이 쫀득쫀득 씹히고 속살은 부드러웠지요.
나와서는 다리를 건너 철학자의 길로 올라갔습니다.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르니, 술기운도 올라오고 고통도 느껴지고. 아하. 다른 게 아니라 이래서 철학자의 길인 건가? ‘내가 왜 이 고생을 하고 있나’ 원초적 질문을 자꾸 묻게 되어서? 싶었지요. 그래도 힘들게 힘들게 오른 끝에 드디어 평평한 길 하나가 나왔습니다. 이 길에는 벤치 여러 개가 일렬로 주욱 놓여있었고 그중 한 벤치에 앉았습니다. 사유의 길로 잘 알려진 이 장소에서 나는 어떤 영감을 받을 수 있을까. 언제부터였지. 스물여섯의 끝자락부터일까. 나는 목적 없이, 정처 없이 떠돌고 있다. 애초에 목적지가 아니었던 길이나 잠깐 새는 길의 예상치 못한 아름다움에 잠시 넋을 잃고, 이 곳에 다다르기 위해 많은 수가 틀렸던 거구나 착각을 하는 건 아닐까 조금 두렵다. 우회하고, 우회하고, 또 우회하여 결국 어딘가에 닿았을 때 이건 아닌 것 같다고 후회하면 어쩌지 처음으로 걱정이 된다. 나는 내가 뭘 원하는지 얼마나 정확하게 알고 있는 걸까. 한 편으로는, 계획한 곳에 일찍 도달했더라도 같은 고민을 했을까 싶기도 하고. 그렇담 결국 이렇게 떠나오는 것은 불가피했을지도 모르겠다며 뫼비우스의 띠 같은 생각만이 맴돌았습니다.
술방울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듯했던 자기성찰은 이내 쏟아지는 비와 함께 끝이 났습니다. 황급히 발걸음을 옮기며 철학자의 길의 내리막길로 빠져나왔습니다. 비스마르크 광장으로 내려가는 길 중간에 두 개의 다리가 놓여있었는데, 우측에는 공원에서 사람들이 일요일의 오후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강과 함께 반짝반짝 빛나 제 눈에 한 없이 아름답게 들어왔습니다. 시내를 터벅터벅 걸으며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 먹고 이번에는 역까지 걸어갔습니다. 중간중간 카페나 식당에서 월드컵을 보며 탄식을 뱉는 청년들을 구경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역에 다 와갈 즈음, 버스가 45분이나 지연됐다는 문자가 왔습니다.(플릭스 버스를 예매할 때 제출한 전화번호로, 물론 로밍한 번호, 문자가 옵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플릭스 버스 어플을 다운로드하면 확인 가능) 하지만 그것이 확실하리란 보장이 없기에 그저 바닥에 앉아 버스를 하염없이 기다렸지요. 버스는 그보다도 10분 늦게 도착했고 드디어 비를 피해 버스를 탑승했습니다.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해서는 그대로 기절해버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