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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석영 May 24. 2021

보미와 클레몽

타지에서 만난 첫 친구들


 입국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입국 제한도 더 심해지고, 8시 외출금지에 락다운이 다시 시작돼 어딜 나갈 수가 없는 처지였다. 게다가 연일 들려오는 동양인 혐오 폭력 사건 소식에 나는 한없이 졸아들어서 집에만 붙박여 있었다. 그러다 너무 답답할 때면 혼자서 10분 거리인 다운타운까지 걸어서 장을 봐 오곤 했는데, 그렇게 무사히 나갔다가 돌아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성과처럼 느껴졌다. 분명 난 결혼을 했는데, 엄마 심부름이나 하던 일곱 살짜리 꼬마로 되돌아간 것만 같았다.


 그땐 아직 겨울이었다. 마당 위에 쌓인 눈은 너무도 견고하게 얼어붙어 쨍한 햇빛으로도 영영 녹지 않을 것만 같았고 아무도 그 위에 발자국을 내지 않았다. 책상 앞 창문을 통해 보이는 바깥 풍경은 그토록 정적이었다. 그런데 내 시선을 훔쳐가는 주범이 몇 있었다. 전깃줄을 타고 뛰어다니는 다람쥐, 나무에서 서성이는 새. 락다운 기간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건 이들뿐이다. 그리고... 클레몽. 클레몽은 내가 몬트리올에 오기 전부터 아흐준이 자주 얘기했던 앞집 고양이였다. 한 번 주방 창문을 통해 우리 집에 온 적이 있었는데, 나를 보고 웬 낯선 인간인가 싶었는지 그 뒤로는 통 오질 않았다. 녀석은 앞 건물 1층을 어슬렁거리며 간식과 애정을 얻어먹고 다녔다.


 아흐준과 나는 클레몽의 간택을 받고자 간식을 바깥에 내다 놓기도 해 보고, 멀리 있으면 간식 봉투를 흔들어 보기도 했다. 처음에는 눈길도 안 주더니, 이윽고 집 안까지 들어오긴 했다. 간식만 먹고 휙 나가 버린다. 야속한 것. 예전에는 집 안에서 오래 놀다가 갔는데 네가 오고 나서는... 하며 말끝을 흐리는 아흐준도 야속한 것. 며칠 뒤 아흐준이 다급하게 불러서 주방으로 가 보니, 또 다른 고양이가 있었다. 회색 털에 빨간 방울을 달았고 클레몽보다 몸집이 훨씬 작았다. 녀석에게 보미, 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내가 간식 봉투를 뜯자 보미는 아무 경계심 없이 창을 넘어 우리 집에 들어와서 간식을 먹고, 내게 머리를 부비고, 집안 곳곳을 구경했다. 30분 뒤 문밖으로 나가길래 이제 가려나 보다, 하고 문을 닫으려 하니 보미가 뛰어온다. 나는 분명 이런 말소리를 들었다.

 "안 돼, 너랑 더 놀 거야!"

 보미는 3일 연속 저녁 6시쯤에 나타났다. 그래서 나는 아예 오후 5시면 식탁에 자리 잡고 앉아 일을 하면서 보미를 기다렸고 보미가 창틀 위에 사뿐 앉을 때면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뉘 집 고양이 인지도 모르겠지만 난 이미 녀석에게 마음을 뺏겨 버렸다. 4일 차. 보미가 나타나지 않았다. 5일 차도, 6일 차도. 일주일 뒤에도. 실망감과 함께 가슴에 차 있던 무언가가 통째로 빠져나간 기분이 들었다. 고작 3일 안에 내 마음을 다 뺏어가 놓고 다신 나타나지 않다니, 야속한 고양이들.


 그 뒤로도 보미는 우리를 찾아오지 않았다. 애타게 3주 정도 기다리고서 나도 희망을 버렸다. 그때 주방 창문으로 손님이 다시 나타났다. 클레몽이었다. 클레몽이 하루에 두 번 정도 우리 집에 오기 시작했다. 낮 12시, 저녁 6시. 너 뭘 알고 이러는 거니? 물었지만 클레몽은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밥을 먹었다. 가끔은 아흐준이 없을 때, 클레몽이 찾아왔다. 내가 창문을 열어 주면 밥을 먹고서 집 안을 탐험하기도 하고 뒹굴다가 내가 쓰다듬어 주기를 기다렸다. 나는 클레몽이 벌러덩 누우면 똑같은 자세로 바닥에 벌러덩 누워 보았다. 10분 정도 그렇게 같은 자세로 멀찍이 떨어져, 햇빛을 받으며 누워 있었다. 어느샌가 클레몽은 간식을 흔들지 않아도, 손짓만 해도 우리 집으로 달려왔다. 가끔 내가 침실에 있어 늦게 나와도 클레몽은 기다렸다가 나를 보고 인사를 하고 갔다.


 이사를 망설였던 건 오로지 보미와 클레몽 때문. 보미가 더 이상 오지 않으니 새 집의 장점이 더 무거워졌고, 결국 이사를 가기로 결정했다. 한창 짐을 싸는 중에 클레몽이 왔었다. 클레몽은 이 상자 저 상자를 들여다보다가 침실로 들어가서 책상이며 가구가 빠진 방을 한참 기웃거렸다. 이사 전날에 다시 온 클레몽에게 나는 작별 인사를 고했다. 클레몽은 평소와 다름없이 간식을 먹고 조금 놀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이사 당일. 아침 9시부터 짐을 옮기기로 했다. 그런데 클레몽이 아침 8시가 조금 넘었을 때 우리 집에 왔다. 단 한 번도 아침 일찍 온 적은 없었는데. 너 정말 뭘 알고 이러는 거니?


 새 집은 2층이다. 이전 집보다 외부의 생물로부터 시선을 빼앗기긴 어려운 구조. 부엌 발코니로 들어오는 햇빛이 참 좋다. 나는 그 햇빛을 받으며 눈을 감을 때면 자주 클레몽을 생각한다. 바닥에 누워서, 하루 중 가장 평화로웠던 시간을 서로 방해하지 않고 나눴던 클레몽. 불쑥 내 인생에 들어와서 잔뜩 졸아들었던 마음을 쉽게도 펼쳐 버린 보미. 몬트리올에서 나눈 첫 묘연들. 아니다. 내 인생에서 나눈 첫 묘연들이었다. 기다리면 오지 않고, 무심한 척하면 어느덧 내 곁에 다가와 있는. 애타는 마음을 느낄 기회가 결혼하면서 사라졌다고, 그게 다행이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다고 생각했는데. 고양이를 기다리는 마음이란 영영 늙지 않을 것만 같다.


   

보미
클레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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