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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휘뚜루 Apr 02. 2022

스타트업 1인 디자이너로 살아남기 - 나의 역할

"어라, 이거 해야겠는데?" 생각이 들면 내가 하고 있는 곳입니다.

2020년 12월부터 현재 일하는 곳에 정식으로 합류하게 되었으니 거진 1년 하고도 4개월 남짓 흘렀다. 여느 스타트업의 시간이 그렇듯, 폭풍과 같은 세월을 겪었기에 1년 4개월이라는 숫자로 남겨진 시간은 조금 억울할 정도로 짧아보이긴 한다. 짧지만 (나에게는 매우) 길었던 시간을 회고해보면서, 주변 사람들이 나에게 물어보는 "혼자서 디자이너로 있으면 어때?"라는 질문에 답해보며, 대부분의 현업에 있는 스타트업 디자이너들이 비슷하게 겪을 그런 경험들을 나눠보고자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스타트업의 1인 디자이너는 본인의 능력치를 시험해보고 성향을 탐구하기에 상당히 괜찮은 편이다. 열정을 태워 2년 치의 일을 1년으로, 1년 치 일을 6개월로 몰아서 하는 느낌이지만, 그만한 '내 작업물'도 상응해서 남는 편이다. 하지만 적어도 디자이너가 1명도 없는 황무지 스타트업에서 일하려면 한 국자의 성향 체크, 두 국자의 용기, 세 국자의 각오가 필요하다. (디자인 능력은 가서 일하다 보면 쌓인다.)


나는 처음에는 대학원생 딱지를 떼지 못해서, '디자이너'라는 타이틀을 신기해하고 어색해하던 병아리 사원이었다. 원래 알던 학부 친구가 이미 파트타임 디자이너로 있었고, 회사 분위기가 너무 좋기 때문에 바로 적응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러다가 함께 일하던 디자이너 친구가 졸업을 위해 떠나고 '진짜' 회사의 1인 디자이너로 남겨지게 되었을 때, 실전 인생이 시작되었다. 화산에서 살아남기, 남극에서 살아남기처럼 "스타트업 1인 디자이너로 살아남기"가 시작된 것이다.



스타트업의 1인 디자이너는 좋게 말하면 회사의 귀한 외동딸이고, 나쁘게 말하면 소녀가장이다.


나의 경험상, 디자인 직군은 거의 모든 일을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잘하기 때문에 회사의 귀한 인재로 동기 동기 예쁨을 받는다. 하지만 그만큼 다 할 줄 알기 때문에 정신 차려 보면 디자인과 관련한 거의 모든 일을 하고 있다.


학부 시절 산업디자인을 전공하면서 수차례 조모임을 통해 느낀 것은, 다들 어지간하면 자기가 맡아서 하려는 자세가 있다는 것이다. 모두가 하나의 프로덕트를 만드려고 할 때, 오로지 퀄리티를 높이기 위한 선한 마음(?)이 모여있기 때문에 서로 일을 미루려고 하기보다는 너도나도 팔을 걷어붙인다. 문제는 이러한 성향의 사람들이 스타트업의 디자이너로 가게 된다면 어지간한 디자인 관련 일은 다 도맡아 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강제하지 않아도 "본인이 원해서" 일을 벌이기도 한다.


하루는 회사 홈페이지를 개편하면서, 내가 디자인한 앱을 메인 페이지로 세워보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인터넷의 휴대폰 목업은 나의 열정을 잠재우기 충분하지 않았다. 나 카메라도 있는데, 손이 고우신 회사 분도 있고, 휴대폰도 있고, 그럼 그냥 휴대폰을 들고 있는 사진을 예쁘게 찍을까요? 그럼 찍었다. 열정이 가득하니 당연히 만족할 만한 결과가 나왔다.

프로덕트 메인 사진을 위한 나의 몸부림


회사(특히 스타트업)는 디자인 업무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모른다. 때때로 그것은 디자이너 본인도 모른다.


나는 분명 UI/UX 디자인이라고 적힌 업무 범위에 서명하고 들어왔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디자인 범위를 모르기 때문에 디자인과 관련한 모든 업무를 가지고 온다. 슬라이드 디자인, 문서 템플릿, X배너, 리플릿 등등.. 아웃소싱을 맡길 때도 있지만, 왜 때문인지 우리 회사가 맡긴 업체는 돈 값을 하지도 않는 것 같다. 그걸 보면 또 내 회사, 내 프로덕트가 적어도 내 눈에는 찰 정도의 퀄리티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스스로 일을 자처하게 된다. 스타트업에서 꺼내지 말아야 하는 금기어--"차라리 내가 하겠다." 이 말을 꺼낸 순간, 내가 하게 되는 것이다.


 스타트업은 디자인 정체성도 거의 잡혀있을 히가 만무하기 때문에, 디자이너가 브랜딩, 카피라이팅 등도 알아서 해야 하는 경우 많다. 이때 변수가 너무 많이 생긴다. 회사에서 이미 사용하던 용어가 바뀔  있고, 주력으로 하는 프로덕트나 타깃이 바뀔 수가 있다. 아예 언어가 바뀌기도 한다. 그러면  그때마다 수정해야 하는데, 업체를 안 쓰고 인하우스 디자이너가 하면 그때그때 바꿀  있으니 회사 입장에서도  편하다. 이제  일을 하기 시작한 새내기 디자이너는 더 이상 디자인 콘셉트가 아닌 실제 프로덕트를 디자인하고 출시하게 되는 것이 뿌듯하고  신기하다. 그럼  열심히 일한다.


회사 사람들의 프로필 사진을 찍는 모습. 이게 어떻게 봐서 시켜서 하는 사람입니까. 진심이지...


더 문제인 것은, 정신없이 일을 쳐내고 때론 스스로 벌리기도 하다가 이게 힘들다라고 느껴질 때쯤에는 그 업무가 이미 나의 업무가 돼버린다는 것이다.


여태까지 금방 금방 끝낼 수 있을 것 같아서 해왔던 업무들이 하나둘씩 많아지고 회사가 성장하면 점점 눈덩이처럼 불어나서, 나의 주요 업무에도 영향을 주기 시작할 것이다. 그때쯤에 "이제는 이거 못하겠어요.."라고 하기엔 너무 많은 강을 건너버렸을 것이다. 그때쯤이면 의문이 든다. "내 주요 업무는 뭐지?"


사실 나는 성향상 하나만 끈덕지게 하기보다는 재미있는 주제들을 사이드 프로젝트처럼 여러 개 돌려가며 하길 좋아한다. 그렇기 때문에 앱 디자이너, 사진사, UX 라이터, 카피라이터, 편집 디자이너 등등 다양해지는 내 부캐들을 사랑했다. 그렇기 때문에 전혀 일이 많거나 다양한 것에는 문제랄 게 없었다. 하지만 그게 나의 주 업무인 앱 디자인, UI/UX에 대한 깊은 고민들도 못할 정도로 방해한다면 그때부터는 문제가 된다.


정신없이 달려오던 와중에, 나는 그래서 인터페이스에, 사용자 경험에 대한 고민을 깊게 하고 있는가?라는 불안함에 밀려왔다. 나는 열심히 커리어를 쌓아왔다고 생각했는데, 넓이는 있지만 깊이가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주요 업무를 정의하려고 하면, 조금 애매해진 내 포지션을 발견하게 된다.


아이스크림 맛보기는 다 했는데, 그중 어떤 맛이 제일 좋은지?


스타트업에서 혼자 디자인을 하고 있다면 장점과 단점은 명확하다. 아이스크림 맛보기처럼 가능한 선에서 내가 원하는 걸 얼마든지 다양하게 해 볼 수 있다. 하지만 다 하다 보면 내가 진짜 원하는 걸 어느새 놓칠 수 있다. 나는 지난 1년 4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내가 원하지 않는 걸 억지로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일에 휩쓸려 내가 진짜 원하는 걸 찾는 과정이라는 것을 까먹고 살았던 것 같다. 그래서 내 취향은 뭐지? 아이스크림 맛은 다 봤는데, 정작 내가 좋아하는 맛은 나도 잘 모르게 돼버린 것이다.


만약 자신의 의지로 들어갔거나, 혹은 외부의 사정으로 인해 혼자 남겨진 스타트업의 디자이너가 있다면, 끊임없이 스스로 물어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 자의든 타의든 일은 다양하게 많이 하게 될 것이다. 중요한 건 "내가 무엇을 가져가고 싶은지"를 명확하게 해야 한다. 결국 나의 최애 아이스크림을 찾는 과정과도 같다. 남들보다 더 빨리, 다양하게 맛을 볼 수 있다. 똑똑하게만 접근한다면 남들보다도 훨씬 더 시간을 버는 길이 될 수도 있다.


나도 나의 최애 아이스크림을 찾기 위해서 앞으로 정리하고자 한다. 어떤 맛을 봤는지, 그래서 나는 어땠는지, 차례차례 정리하고자 한다.


전 세계에 있을 혼자 있는 디자이너들 파이팅! 각자의 위치에서 씩씩하게 살아남길.


<스타트업 1인 디자이너로 살아남기> 시리즈를 연재 중입니다

1. 스타트업 1인 디자이너로 살아남기 - 나의 역할

2. 스타트업 1인 디자이너로 살아남기 - 회사 브랜딩

3. 스타트업 1인 디자이너로 살아남기 - 캐릭터 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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