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편하게 접근했을 때 더 잘 보이는 내 흥미와 능력치
회사에 합류하고 도메인 지식을 쌓게 되면서 앱 사용자들이 ‘약을 많이 먹는다’, ‘평생 먹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때쯤에는 앱의 기능 명세를 마치고 인터페이스 설계를 하고 있었는데, 화면 요소를 나열하려다 보니 그래픽적으로 심심한 느낌이 들었다. “그럼 캐릭터를 만들어 볼까?” 그렇게 회사에서의 첫 사이드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약을 캐릭터를 만들어보자고 결정한 뒤, 스케치를 빠르게 시작했다. 알약의 모양과 색은 친근할 수 있도록 사용자들이 많이들 먹는 약을 선택했다. 일필휘지로 스케치를 끝내고, 일러스트레이터로 옮기는 작업을 가졌다. 간단한 모양인 덕분에 행동과 생김새에 제약이 없었다. 생각보다 점점 더 캐릭터들의 영향력이 커졌고 '알약이'가 아닌 캐릭터 이름을 지어주자는 의견에 사내 공모전도 진행했고, Capsule(캡슐)에서 따온 ‘캐피’, Tablet(정)에서 따온 ‘태비’가 각각 알약 캐릭터들의 이름이 되었다.
만들고 보니 팀원들의 반응도 뜨거웠다. 저마다 ‘태비 파’ ‘캐피 파’ 등 최애를 지지하는 파벌(?)도 생겼다. 재미로 시작했지만, 개인적으로도 만족도가 높았다. 알약을 귀엽고 친근하게 만들어 사용자들에게 약의 새로운 이미지를 선물하고 싶었다. “평생 먹어야 하는 귀찮은 존재”에서 “내 건강을 챙겨주는 평생의 동반자”로 인식되었으면 했다. 마음이 사용자에게 전달되었던 걸까? 캐릭터를 활용한 굿즈를 만들고 나눈 이벤트를 진행했을 때 커뮤니티 이벤트에서 가장 반응이 뜨거웠다. 이후 사용자 인터뷰에서 “주치의 요정” 같다며 캐릭터에 대한 상당한 애정을 느끼기도 했다.
이후 앱의 페르소나, 보이스 앤 톤을 정할 때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앱’이 사람으로 태어난다면 어떨까?라는 질문에 건강 코치’, 등으로 정의하였다. 마이크로카피 가이드라인을 작성하면서 친절하지만 위험할 때는 주의 팻말을 들고 단호한 태비의 모습을 떠올리거나, 궁금한 것이 있으면 구멍에서 쏙 나와서 질문에 답해주는 캐피의 모습을 떠올리기도 했다. 친절하되, 아닌 것은 아니라고 확실히 고지해주는 앱의 목소리는 캐릭터를 통해 친근하게 전달하였다.
개인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사이드 프로젝트의 새로운 재미를 일깨워준 소중한 경험이었다. 사실 나는 캐릭터 디자인도, 시각디자인도 전공하지 않았고 제품 스케치만 하던 사람이었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이 편했다. 크게 잘하지 않아도 되는, "실패해도 괜찮은" 사이드 프로젝트였던 것이다. 이 말은 누군가에겐 꽤나 부정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나에겐 긍정적으로 작용하였다. 짬을 내서 캐릭터를 더 만들기도 했고, 아무도 시키지 않았던 시즌별 캐릭터를 만들기도 하였다. 캐피와 태비에게 크리스마스 고깔모자를 씌우는 내 모습을 보며, 마음이 편한 게 이렇게 나를 훨훨 날게 한다니 참으로 신기한 힘이라고 생각했다.
앱을 디자인할 때는, 생각보다 고민해야 할 요소가 너무 많다. 어떤 틀에 나 스스로를 가두기도 한다. 이 글자/요소 크기가 남녀노소 괜찮은가? 이 말을 쓰는 게 사용자가 너무 어렵지 않을까? 요소 간 간격은 충분한지, 색은 충분히 대비감 있고 시선을 끄는지? 그 와중에 독창적인지 등등... 숱한 고뇌의 과정은 나를 더욱더 단단하게 만들었지만, 반복 작업과 풀리지 않는 문제 그 사이에서 일의 재미를 잠깐 잃어버리게 만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캐릭터 디자인은 나름 환기를 해주고, 앱 디자인에 더 애정을 갖게 만드는 재밌는 사이드 프로젝트가 되어줬다.
회사를 떠나온 지금, 가끔 앱 생각은 나지 않더라도 이 친구들 생각은 날 때가 있다ㅎㅎ 마치 장성해서 떠나보내고 온 자식 같은 느낌? 그 정도로 캐릭터의 힘이 크고, 내가 마음 쓴 프로젝트의 힘이 큰가 보다.
<스타트업 1인 디자이너로 살아남기> 시리즈를 연재 중입니다
2. 스타트업 1인 디자이너로 살아남기 - 회사 브랜딩
3. 스타트업 1인 디자이너로 살아남기 - 캐릭터 디자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