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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거북이 Sep 08. 2020

코로나, 우울함, 그리고 정신분석

수도권은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가 지속되고 있다.

사람들과 교류도 제한하고, 가끔 마스크를 쓰고 산책 정도만 하고, 거의 집에서만 지내고 있는 생활이 벌써 3주가 넘어간다.

맨날 한정된 공간인 집에서 같은 생활을 반복하고 있다.

게다가 가족끼리 할 수 있는 얘기가 뭐 얼마나 깊이 있고 다양할까나.

다들 하고 싶은 말, 마음에 있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그렇게 지내고 있을 것이다.

반강제적으로 고립되어 소외감을 느끼는 상황이다.

우울함은 '아.. 우울하다.'라는 감정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대개 가슴이 답답하고 부아가 치밀어 오르는 신체반응과 뛰쳐나가고 싶고 소리를 꽥 지르고 싶다는 생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래서 오래간만에 친구 00 이에게 카톡으로 대화를 해본다.

그리고 오래간만에 친구 00 이와 전화통화를 하여 근황을 묻고 대화를 해본다.

용기를 내어 같은 아파트 단지의 아이 친구 엄마에게 커피타임을 제안하여, 커피를 테이크 아웃해서 벤치에 2미터를 떨어져 앉아 잠깐 만나고 헤어진다.

우리는 엄마들이기에 오전에 원격 수업할 때 잠시 짬을 내서 만날 수 있지, 그 이상 오래 만나면 엄마의 직무유기이다.


이렇게 만나면 그때 잠시 기분이 나아지지만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다.

왜 그런 걸까?

답답함으로 드러나는 외로움과 우울감을 해소하려고, 여러 사람들과 접촉하려고 했고 접촉도 했다.

그런데도 왜 나는 계속 답답함이 가시지 않을까?


수많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잠시 접촉의 시간은 있었지만, 만남 이후 또 꽉 막힌 골방 같은 상황으로 되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그 골방에서 언제 자유롭게 탈출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러한 자유의지의 박탈이 사람을 무력하게 만든다.


다른 생각으로는 접촉의 양과 질이다.

우리는 만났지만 너무 짧았다.

그리고 자주 만날 수도 없다.

짧은 시간 동안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얼마나 될까?

진짜 내 이야기를 할 수가 있을까?

요즘 우울해, 힘들어, 코로나 언제 없어지나... 이런 이야기를 하다가 끝나게 된다.

한마디로 너와 내가 함께 공유하는 시간의 총량과 함께 나누는 이야기의 밀도와 질이 너무 얕아진 것이다.


끈적끈적하고 뒤얽혀있는 마음과 마음의 소통이 제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진짜 나의 모습과 너의 모습을 제대로 드러내고 바라보고 함께할 시간이 주어지질 않는다.

그런 여유가 없다.

시간적, 물리적, 심리적 여유가 없다.


흠... 바로 윗 단락의 말을 다시 읽어 보자..


끈적끈적하고 뒤얽혀있는 마음과 마음의 소통이 제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진짜 나의 모습과 너의 모습을 제대로 드러내고 바라보고 함께할 시간이 주어지질 않는다.

그런 여유가 없다.

시간적, 물리적, 심리적 여유가 없다.


난 왜 이 단락이 낯설지가 않을까.

코로나 전에도 우리는 이러했다.

우리는 코로나가 없을 때, 바빴다.

일하기 바쁘고 공부하기 바쁘고, 세상은 빨리 변해서 따라가기 바쁘고.

그러다 보니 원래도 사람들과 여유 있게 시간적, 물리적, 심리적 에너지를 써가면서 만나지 않았다.

근데 그때는 워낙 바빴기 때문에,

소통이 막히고 소외감을 느껴도, 우울해도, 답답한지 모르고,

그냥 바쁜 것만 따라가느라 정신이 없었던 것이다.


심리치료도 점점 단기치료, 혹은 치료자 없이 앱으로 체크하는 그런 치료프로그램이 늘어나고 있다.

이런 치료들은 효율적이라는 이유로 최근에 많이 각광받고 있다.

치료 1회당 비용도 비싸고, 시간도 50분이나 걸리는데,

만남의 횟수를 확 줄여서 비용도 줄이고, 효율적으로 하자는 것이다.

게다가 치료자를 만나러 갈 시간도 부족하고,

필요할 때 밤에는 낮이든 언제든지 만날 수 없으니까... (이 얼마나 일방적인 생각인가)

최신 기술을 접목하여 컴퓨터화된 치료프로그램으로 개입을 하자.

최고의 효율이 아닌가?

게다가 비대면이 필요한 요즘에는 더 적합한 방법이다.


하지만, 이러한 효율을 따지다 보면 사람의 진짜 마음이 소외가 된다.

인간의 끈적끈적하고 날것의 마음은 아무도 알 수 없게 된다.

효율성을 따진 치료가 오히려 마음을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나는 오늘 짧은 만남을 뒤로하면서 알게 되었다.

단기의, 혹은 단발성의, 혹은 기계화된 치료를 통해 진짜 사람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말이다.

분명 그 안에서 진짜 마음이 소외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앞으로 정신분석이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많이 필요할 것이라고, 더욱더 느끼게 되었다.


정신분석은 짧게 만나고 헤어지는 치료가 아니다.

겉으로 드러난 것만 이야기하고 정리하는 치료가 아니다.

그 이면의 내 마음을 너무 궁금해한다.

그리고 당신이라는 사람이 누군지 너무 알고 싶어한다.

당신만 원한다면, 당신이라는 사람의 이야기와 마음에 관심을 기울이고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당신의 포장되지 않은 날 것의 모습, 숨기고 싶은 모습까지도, 함께 하게 되는 것이다.


요즘처럼 잘 포장해서 드러내기 좋아하는 시대에,

그리고 바쁘고 빨라서 효율적인 만남을 강조하는 시대에,

정신분석, 그리고 정신분석적 마인드가 얼마나 필요한지.. 절절히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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