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미국인이나 영국인으로
영어 유전자가 있지 않을까? 일생 그렇게 생각하고 살았다. 영어가 정복이 안 되니 중국어를 몇 년 전에 공부했다. 꿈은 죽기 전에 이탈리아에서 살아 보는 것이라 이탈리아어도 공부해야 한다. 순서는 중국어, 영어, 이탈리아어로 공부해 나가기로 결심했다. 중국어도 만만치 않았다. 사성도 있고 발음기호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래도 목표가 있어야 열심히 할 테니까 HSK시험도 응시하기로 했다. 나 역시 과거 종로의 외국어학원부터 시작한 강사 출신이라 학원을 고르는 안목은 출중하다. 강남역의 강사진의 수준이 가장 높은 곳으로 등록하여 몇 개월 동안 중국어에 매진했다. 사실 중국어를 했던 이유 중에 하나가 약자를 읽기 못 하는 분함이 컸었다. 어릴 때부터 한자 신동이라고 스스로 자부하는 내가 그들이 확 줄여 놓은 약자를 전혀 읽기 못해서 분통이 터졌었다. 읽고 쓰고 독해하는 것은 쉬웠다. 문제는 듣기였다. 쓰, 쯔 발음이 너무 많아 전혀 알아먹을 수가 없었다. 시험 기간은 수험생 모드로 밤새도록 시험 문제를 틀어 놓고 들었다. 어찌어찌 HSK 4급은 합격을 했다.
시험은 합격했지만 중국어는 한 마디도 알아 들지 못하고 대화도 할 수 없다. 그렇다면 회화를 해야겠다고 문화센터도 여러 번 기웃거렸다. 중국인 강사에게 중급반 회화 수업도 들었지만 숱하게 좋은 문장도 외워서 발표도 했지만 결국 실패로 끝났다. 그게 벌써 또 시간이 흘러 10년도 더 전이다. 요즘 간혹 티브이에서 중국어가 나오면 귀 기울여 들어 보지만 들리는 단어는 별로 없다. 그래서 다시 영어를 시작하기로 한다. 또 몇 년 전에 영국 사람이 가르치는 회화 수업을 다녔었다. 완전 기초 회화반. 잘생긴 젊은 강사를 둘러싼 아줌마들의 무시무시한 텃세로 3개월 만에 끝났다. 회화반 수업은 역시 내 적성에 맞지 않는다. 나는 내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다 시키지만 나는 안 시키는 수업이 좋다. 그것도 5, 6년 전이다.
코로나가 지나가고, 내 학원이 망하고, 대형 학원에서 자리를 잡고, 빚도 어느 정도 갚아나가게 되니 유럽을 가보고 싶다는 열망이 다시 살아난다. 고양이 두 마리를 돌봐 줘야 하는 노모가 살아 계실 동안 갔다 와야 할 거 같으니 서둘러야 한다. 이렇게 얘기하니 엄청 왕싸가지로 보이겠지만 30년 이상 효녀 심청이 이상으로 살아와서 그 정도는 가능할 거 같다. 그래서 다시 영어가 필요하게 되었다. 어떤 형태의 유럽 여행이든 영어라도 해야 할 거 같다. 3월부터 영어 강의를 다시 등록한다. 일주일 한 번 회화에 필요한 문법 강의라는 제목의! 벌써 4회 수업을 했다. 첫 수업 때 한 장 프린트를 준다. 영어 문장이 5개쯤 적여있다. 해석이 될 리가 없다. 파파고로 바로 해석을 한다. 어렵다. 하긴 수준이 다 다른 사람들을 묶어서 어떻게 진행할까 궁금했는데 이런 방법도 있구나 무릎을 쳤다. 역시 사람은 늘 배워야 한다.
한 문장에 나오는 문법과 어휘를 받아 쓰니 노트 한 페이지를 채운다. 중학교 수준의 문법이라고 강사님이 말씀하시고 기억 속을 아무리 헤집어도 떠오는 것이 없다. 복습을 해도 내 수준 밖이다. 문장을 자꾸 반복해서 읽어 내 것으로 만들라고 하는데 사상누각이다. 인터넷을 뒤진다. 중학교 문법책을 사야겠다고 생각한다. 웰컴 스펠링도 l이 몇 개인지 헷갈리는데 중학교부터 해야겠다. 좋은 교재를 찾았고 가까운 교보문고에 재고가 있다고 하니 가서 보고 사려고 갔다. 서점에 갔더니 중학생보다 초등학생 교재가 있었다. 글자도 크고 컬러고 수준도 딱 맞는다. 요즘은 4학년부터 영어를 하나 보다. 하긴 영어 유치원부터 하겠지... 초등학교 문법 교재가 총 8권이다. 중학교는 3권! 난 11권을 마스터해야 한다. 한 달에 한 권씩 하면 일 년이 걸리겠다. 아아 즐겁다. 살아 본 결과 계속하기만 하면 잘하게 된다. 그 계속하기가 힘들 뿐이다. 어른이란 그렇게 시간적으로 경제적으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어 공부로 중국어에서 막힌 이탈리아어의 길을 다시 모색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