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사가 보여주는 삶의 모습
할 줄 아는 요리가 라면과 밥, 김치찌개가 전부였던 내가 끼니때마다 요리를 하게 된 이유.
원체 밥을 천천히 먹는 편은 아니었지만 처음 아르바이트를 하던 날의 저녁 시간은 아직도 생생하다. 음식을 앞에 두고 언제 손님이 올지 몰라 꾸역꾸역 입으로 음식을 욱여넣는 장면을 봤을 때의 충격. 식지도 않은 피자를 허겁지겁 먹는 사장님의 모습을 봤을 때 나는 측은지심보다도 그날 아침 이후 처음 먹는 식사에 넌더리를 느끼고 말았다. (정확히 2주 후 나는 사장님보다 더 빠른 속도로 식사를 해치우고 손님을 맞았다)
아마 그때 처음으로 식사 시간을 여유롭게 향유한다는 것, 그 행위 자체가 의미하는 삶의 여유에 대해 어렴풋이 느꼈던 게 아닐까 싶다. 식사를 할 때 설거지 거리가 나오는 앞접시와 각종 식기도구를 활용하고, 밥과 반찬에 여러 가지 재료를 넣고 또 각종 조미료를 첨가하는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늘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얹었던 이전에는 느낄 수 없던 일이었다.
몇 개월 후 대학 생활을 시작하고나서부터는 학보사니 대외 활동 등을 하며 외식으로 주 끼니를 때우게 되었는데 이때 나는 식사에 대한 소신을 갖게 되었다. 바로 식사나 요리를 하는 행위 자체를 효율성이 떨어지는 일로 받아들이게 된 것. 당시 가족들이 붙여준 별명이 동분서주였던 내게 시간은 자동차 연비와도 같아서 최소한의 시간에 최대의 일을 해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있었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그리 불안해하며 살 필요도 없었거늘 그땐 왜 그리 하루가 쫓기듯 지나가던지.
그리고 최근 자취를 시작하고나서부터는 스스로 밥상을 차리고 끼니를 때우며 살고 있다.(소신이니 뭐니해도 동네 물가가 비싸서 식비 아끼려고 하게 되었다) 이 작은 일상의 변화는 스스로를 대하는 나의 태도 또한 변화시켰는데 처음엔 냉동 조리 식품을 그릇에 예쁘게 담아내는 것에서부터 시작한 일이 어느덧 마트에서 각종 식재료를 구입하고 볶고 굽는 등의 조리 과정을 거쳐 밥상을 차려 내는 것에 이르게 되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나는 식사 때마다 마치 스스로가 대단한 사람이 된 것 마냥 느꼈는데 아마 자신이 스스로에게 존중받는다는 기분에 취해 그렇지 않았나 싶다.
물론 요리라 부르기에 아직 민망한 것들이 많지만 이전보다 더 충족감을 느끼는 이유는 재료를 손질하고 밥상을 차리는 일들이 현재 내 삶의 모양이 이전에 비해 그다지 팍팍하지 않음을, 나에게 정신적인 여유가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렇다.
보잘것없는 플레이팅을 하느라 설거지 거리를 만들고 또 굳이 필요하지 않은 추가 반찬과 국을 만들면서 시간을 소모하는 일은 정말이지 마음에 여유가 없다면 하기 힘든 일이니까.
그렇지만 여전히 쫓기듯 먹는 습관은 고치기 어려워서 먹다가도 아차, 싶어 지면 그제야 그릇을 들고 우걱우걱 숟가락을 들고 있던 손을 놓는다. 칼이나 국자를 들었던 시간만큼이나 먹는 순간에도 천천히, 쫓기듯 먹지 말자고 다짐하면서.
하지만 머지 않은 날에는 시간에 쫓기고 사람에 시달려 무엇을 해 먹을지 고민할 여유가 없는 날이 오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내가 정말 스스로에게 간절히 바라는 것은 그때가 되어서도 정성스럽게 끼니를 때우는 것. 온전히 자신만을 위한 이 이기적인 시간을 스스로 놓아버리는 날이 오지 않길 바라며 오늘도 난 밥상을 차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