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하는 길, 유니클로에 들렀다. 내 기럭지에 택도 없는 오버핏 코트가 눈에 들어왔다.
별로 일거 알지만 입어나 보자, 혹시 모르잖아.
들고 있던 짐까지 바닥에 내려놓고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었다. 시크한 스타일인 줄 알았는데 거울을 보니 그냥 인생에 무심해 보이는 사람이 있었다. 함께 온 엄마는 숨이 넘어갈 듯 웃었다. 엄마, 이건 옷이 아니고 입는 이불이야. 깔깔. 미련 없이 코트를 벗어두고 잘 맞는 니트만 몇 벌 챙겨 나왔다. 누가 알까, 지금이야 웃어넘기는 일상이 사춘기 때부터 이어진 사투의 산물이라는 걸.
10대 초반, 집에는 동생에게도 나누어주어야 할 미모 스탯을 모조리 가져가 버린 언니가 있었고 단짝 친구는 허구한 날 처음 보는 사람에게 고백을 받아 왔다. 더 어릴 때야 예쁘고 못났고 구분도 없었고 관심도 별로 없었지만 사춘기에 들어선 나는 거울을 자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들이 세상으로부터 받는 호의는 둘째 치더라도 내 눈에도 아름다운 그들의 인상이 갖고 싶었다. 하지만 15년도 채 되지 않는 인생을 털털하게 살아온 바, 꾸밀 줄도 모르고 그리 부지런하지도 않았던 나는 그저 친구가 입는 옷을 입고 언니가 칠하는 매니큐어만 바르면 그들처럼(!) 되리라, 참으로 단순한 생각을 하기에 이른다.
말 걸기도 무서운 언니에게 빌어서 매니큐어를 바르고, 생전 처음으로 스스로의 주도 하에 쇼핑에 나섰다. 열심히 시내를 돌아다니다 어느 보세 매장에서 친구 옷을 발견했을 때의 반가움이란.. 웬만한 메이커 뺨치는 가격도 문제 될 게 없었다. 나는 당차게 소리쳤다. “저거 주세요!”
남 좋아 보이는 건 다 갖다 붙였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처음으로 멋을 부려본 소녀의 부푼 마음은 거울을 본 순간 쪼그라든 풍선처럼 작아지고야 말았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이후 나에게서 전에 보이지 않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어, 난 쌍꺼풀이 없네? 코도 낮고, 얼굴도 큰 편인 것 같아. 누군가를 동경하는 것과 내가 스스로를 부정적으로 여기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안타깝게도 나는 얼마 후 스스로를 포기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후 늦둥이 동생이 태어나 집안의 귀염둥이 막내 자리에서 박탈당한 나는 격렬한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스트레스성 폭식을 습관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턴 누군가와 쇼핑을 가도 구경은커녕 멀찍이 서서 동행인들의 쇼핑이 끝나길 기다렸다. 주변의 권유에 마지못해 탈의실에 들어가면 한숨부터 나왔다. 몸에 맞는 옷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람이 평생 움츠리고 살 수만은 없는 법. 다이어트처럼 스스로 노력했던 부분도 있지만 보통 사람들이 하는 알바나 대외활동처럼 사회생활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됐다. 세상은 황새와 뱁새가 아니라 참새, 비둘기, 독수리도 모여 사는 세상이라는 걸. 아직도 가끔은 스스로가 못나 보일 때도 있지만 이제는 그런대로 괜찮은 날이 많은데, 스스로를 괴롭히던 학창 시절을 떠올리면 왠지 좀 씁쓸하다.
그 언젠가 잠이 오지 않는 새벽, 친구와 오랜 통화를 하다 친구의 마음에도 거울을 외면하던 어린아이가 있구나, 느꼈던 순간이 있었다. 절대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친구였는데, 내가 너의 친구라서가 아니라 너 정말 예쁜데, 너 왜 그런 생각을 했니. 이런 말도 실례인가 싶어 가만 생각하다 내 이야길 털어놓았는데 수화기 너머로 친구가 물었다. 너 왜 그런 생각을 했니?
문득 개중에 내가 뱁새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있잖아, 뱁새는 그 짧은 몸통 덕분에 황새가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본대, 좀 멋지지 않니. 소외되고 외로운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는 건 내가 그랬기 때문인 거야, 이 노랠 부른 가수도 외모 콤플렉스로 똘똘 뭉친 어린 시절을 보냈대. 그러니까 있잖아, 만약에 내가 아주 오랜 시간 펜을 놓지 않는다면 이 세상의 뱁새들을 위한 글을 쓰지 않을까? 난 황새 마음은 모르잖아.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상처받은 어린 시절이 무척 자랑스럽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