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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홍 Mar 03. 2023

할 수 없는 일

용서란 무엇인가

 지나가는 구름도 원망스럽던 시절이 있었다.

 동생의 키가 아직 내 허리춤 밖에 오지 않던 어느 날, 예고도 없이 찾아온 이별을 앞두고 우린 서로의 손을 잡고 정처 없이 거리를 떠돌았다. 집엔 모르는 사람들이 제 집 마냥 드나들며 짐을 골라가고 있었고 우리는 그 앞에 주저앉아 세상을 잃은 듯이 울다가 그도 더는 못 보겠어서 뛰쳐나온 터였다. 그때 올려다본 하늘이 더럽게 맑았는데 그게 참 싫었다. 지금 내 마음은 지옥인데 왜 당신들은 멀쩡한 지, 세상은 왜 어제와 같이 돌아가는지.


 이후 동생이 나보다 커서 제 발로 우리를 찾아올 때까지 난 동생이 커가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동생은 차로 15분이면 만날 수 있는 거리에 있었지만 우리에겐 잠깐의 만남도 허락되지 않았다. 집이나 학교를 찾아가도 마찬가지였다. 동생을 만나기 전까지 돌아가지 않겠다는 말엔 대답 대신 경찰차가 왔다. 같은 자식이었지만 언니와 나는 엄마 딸이었고, 동생은 아빠 자식이었다. 아빠가 두고 간 못쓸 물건들과 함께 나뒹굴며 생각했다. 아, 나도 버려졌구나.


 그때 난 아빠를 잃었다. 가족사진 속 남자는 평생에 걸쳐 기필코 꺾어야만 하는 존재가 되었다. 꼭, 그 끝은 행복하지 못할 거야, 내가 반드시 그렇게 만들 테니까. 그렇게 복수심으로 10대를 보내고 누군가를 증오하며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20대를 맞이했다. 그리고 지금, 30대를 앞둔 나는 어떻느냐고? 우습게도 그럭저럭 산다. 이렇게 그 시절 상처를 글감으로 써먹고 어쩌다 스스로가 미워지는 날엔 탓할 수 있는 아빠가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하면서. 사회생활이 너무 고단한 날엔 당신도 이랬을까 생각한다. 그 시절을 그래도 잘 견뎌냈다고 가끔은 스스로를 대견해하기도 하고 상처 한번 받아본 적 없는 사람처럼 자주 웃는다.


 하지만 누군가 나에게 아빠를 용서했느냐고 묻는다면 쉽게 대답하지 못할 듯싶다. 구태여 내가 용서해서 생긴 일이 아니라 그렇다. 함께 살아온 시간의 절반보다 많은 시간을 미워하고 증오하는 일에 썼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시간이 흘러가듯 증오도 설움도 잊혀져 갔다. 흉터는 남았지만 이제 지나간 사람이 되었고 굳이나 묻어둔 기억을 끄집어내어 그로부터 고통받고 싶지 않다. 아직 여전히 가끔 꾸는 악몽과 불면에도 불구하고 아빠의 안녕을 바라는 건 온전히 내 평화를 위해서다. 관용 같은 게 아니라. 이걸 용서라 부를 수 있을까?


망각이란 (⋯) 단순한 관성적인 힘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능동적인, 엄밀한 의미에서 긍정적인 제동능력이다. (⋯) 의식의 문과 창을 때때로 닫는 것, 약간의 의식의 공백이야말로 능동적인 망각의 효용인 것이다.

- 니체, <도덕의 계보> 제2논문
용서를 위해서 첫 번째 필요한 요소는 ‘기다림과 침묵’입니다. 아담이 범죄 한 후 인간을 용서하기 위해 하느님께서도 4000년이 지난 다음 아드님을 보내셔서 화해하셨습니다.

-박재찬 안젤모 신부, <용서 1:하느님 사랑을 배우는 길>


 그러니까 하느님의 화해도 4천 년이나 걸리셨으니 한낱 400년도 살지 못하는 나는 그냥 이대로 상처 주는 이들을 마음껏 미워하며 살아가면 안 될까? 그래서 시간이 흘러 잊혀지면 잊혀지는 대로, 그도 안되면 지쳐서 나가떨어질 때까지 미워하며 살고 싶다. 성숙하지 못한 인간에게 용서란 제 능력 밖의 일이라 시도조차 해본 적이 없는 죄인은 잊혀지기 만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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