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지지 않을 나의 도시
겨울에서 봄으로 계절이 바뀌었지만 장롱을 채운 옷의 빛깔은 여전했다. 처음 세종에 와서 ‘여기는 무채색 아니면 네이비색만 입어야 하는 규칙이 있느냐’고 우스갯소리를 하던 게 엊그제였다.
비슷비슷한 무채색의 옷들을 보며 왠지 내가 재미없는 사람이 된 듯한 기분에 잠겨있다 장롱 한편에 놓인 형형색색의 꽃무늬 점퍼가 눈에 들어왔다. 맞다, 나에게도 저런 옷을 입던 시절이 있었지.
때는 빅뱅이 완전체로 활동하던 시절, 난 부산에 자리를 잡은 지 막 2년 차가 된 대학생이었다.
모임 시간에 늦어 지하철역부터 혼자 단거리 마라톤을 뛰고 있는데 동기가 카톡을 보내왔다. ‘니 어데고?’ 부산 사람들은 여러모로 재미있는 점이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웃긴 건 카톡도 사투리로 한다는 점이었다. 문자에서 느껴지는 명확한 높낮이의 억양에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곧 간다고 답장을 보내려던 찰나, 동기가 한 마디를 더 보탰다. ‘마 도랐나.’
당시 내가 일상에서 찾은 소소한 재미는 고향과 다른 부산만의 개성적인 면을 찾는 일이었다. 러시아도, 중국도 아니고 코딱지만 한 땅덩어리에 모여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다르겠냐마는 근 20년을 충청도의 작은 소도시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 부산은 외국이나 다름없었다. 도시의 크기도 크기였지만 사람들 성향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정치 성향이라든지 개인사처럼 고향에서는 친구들끼리도 잘하지 않는 말을 부산에서는 길거리에서 떠들어댔다. 그런 말은 조심해야 하지 않겠냐는 염려에는 “내가 낸데(이게 난데)” 라든지, “우린 솔직하다이가” 라고 특유의 자부심까지 내비쳤다. 원만한 사회생활을 위해 속마음을 포장하는 일에 익숙했던 나에게 그들의 언행은 여지없이 충격적이었다.
자신을 드러내기에 주저함이 없는 성정만큼 부산 사람들은 보기에도 어딘가 튀는 구석이 있었다. 쉽게 도전하기 어려운 색이라든지 패턴이 크고 독특한 스타일을 즐기는 사람들이 유난히 많았다. 여의도에 가면 정장을 입은 비즈니스맨이 많듯이 부산에는 유난히 쨍한 색감과 화려한 스타일의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그런 개성은 자연환경과도 꼭 닮아 있었다. 내륙인 고향은 관광지와는 거리가 멀었고 날씨는 물론 산과 길도 모두 완만했던 반면에 부산은 사시사철 사람이 많은 해안가 관광지였다. 놀 곳이 많은 건 둘째치고 동네에서 산책이라도 하려면 캐리어를 끄는 여행객과 몰려드는 단체 관광버스를 비집고 나가야 했다. 게다가 도로 경사는 어찌나 가파른지 운전 험하기로는 전국에서 악명을 떨친 지 오래였고 우리 학교는 단지 평지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입결이 높아지는 지경이었다. 그뿐이랴 뉴스에 보도되는 재난급 태풍과 폭염은 매년 오는 행사였고 사람이 많은 만큼 사건사고도 끊이질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 소란을 사랑했다.
화가 나면 화가 나는 대로 소리치고, 크게 웃고, 남의 이야기에도 크게 울던 사람들. 잠들지 않는 해수욕장의 거리, 반짝이던 물결과 태풍이 지나간 후 언제 그랬냐는 듯 푸르게 개던 하늘. 가족이 해체되고 실체 없는 불안에 시달리며 갈등하던 나에게 변덕스럽고 투명한 사람들과 자연은 어떤 해방감을 가져다주었고 그곳에서 난 자유로울 수 있었다. 더 이상 어리지 만은 않고 그렇다고 어른은 더더욱 아니었던 그 시절, 난 그들과 같이 어설프게 사랑하고 치열하게 아팠다. 꾸밈없는 그들 덕분에 누구나 다 아픔은 있고 어느 정도는 이해받지 못할 면이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러면서 내가 무얼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깨닫고 표현할 수 있게 만든 그 소란을 난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어쩌면 그것이 청춘의 한 시절이 가져다주는 당연지사 한 통과의례일지라도 여전히 내가 나답지 않다고 느껴지는 순간을 맞닥트릴 때면 홀로 벤치에 앉아 바라보았던 일몰의 바닷가를 떠올린다. 이미 지나가 버린 계절이지만 내가 가장 나 다울 수 있었던 곳. 길지 않은 인생에 가장 짧은 시간 머물렀던 부산을 난 고향처럼 자주 그린다.
그렇기에 만약 내 인생에 단 한 개의 도시만 남길 수 있다면 나의 두 발은 주저 없이 소란스러운 그곳으로 향할 것이다. 나고 자란 곳도 아니고 태어나서 본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지닌 여행지도 아니며 이젠 가족들도 없고 친구들도 몇 남지 않은 그곳.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듯 인생의 가장 어두웠던 터널을 지나 그곳에서 난 색을 입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 내 이름마저 까먹는 순간이 온다 해도 치열하게 아름다웠던 내 푸른 봄철은 영원히 지지 않고 내 가슴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