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지홍 May 14. 2024

꿈의 용사


'장래희망'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고뇌했던가. 최근엔 고등학생도 스스로 시간표를 꾸릴 정도로 (과거에 비해) 자기주도적 학습을 권장하고 있고 인플루언서처럼 10대가 선망하는 직업이 장래희망 조사에 반영되고 있지만 2000년대 초반 나와 같은 유년기를 보낸 또래들은 학습은 물론이고 꿈 또한 부모의 뜻에 따르는 일이 보편적이었던 듯 싶다. 그래서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어도 장래희망란을 채운 꿈만큼은 의사나 판사, 변호사처럼 사회적인 인정과 명예가 보장되는 일이 대다수였을지도.

 나는 어땠는가 생각해보면 원체 책상 앞에 오래 앉아있질 못했고 책은 좋아했으나 그 또한 위인전이나 과학책엔 흥미가 없어 하루종일 동화책만 보면서 공상에 빠져있었는데 이런 성향과 원체 약한 몸을 타고난 덕분에 부모님은 '건강하게만 자라달라'는 소박한 바람을 갖게 되었다. 덕분에 난 집안의 온 기대를 받는 언니와 다르게 어릴 적부터 자유분방한 장래희망을 가질 수 있었는데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처음으로 장래희망으로 써낸 기자부터 시작해 사진작가, 영화감독까지 실로 다양한 직업을 꿈으로 삼았다. 

 이처럼 장래희망은 자주 바뀌었지만 청소년기에 이르러 스스로 인문학과 창의성을 기반으로 하여 예술성을 지닌 콘텐츠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은 계속해왔던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일들은 모두 웬만해서는 밥 벌어 먹고 살기 힘들다는 현실적인 문제와 재능의 한계를 깨닫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어렸을 적 꿈을 가슴에 품은 채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그래서 다음 생엔 못다 이룬 꿈(직업)을 이루며 살고 싶으냐 묻는다면 쉽게 대답하지 못할 듯 싶다. 최근 들어 내가 원하는 것은 직업이나 꿈보다 사실 어떤 상태에 도달하는 일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토록 원하던 꿈(직업)을 이뤄보지도 않고 어째서 이런 말을 하느냐면 직업이 인생의 행복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나와 타인의 삶을 통해 배웠기 때문이다. 바라던 직업을 갖든 갖지 못했든 나와 그들이 가진 고민은 크게 다르지 않았고 그리하여 더더욱이 영영 이룰 수 없는 내 꿈은 형용사가 되었다. 일시적일 수 밖에 없는 어떤 만족감에 이른 상태. 누군가가 꿈이란 사실 명사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갈 것이냐는 동사로 이루어져 있어야 한다는데 아직 그처럼 큰 사람이 되지 못한 나는 다음 생에는 무슨 일을 어떻게 하고 싶느냐는 포부보다 무슨 일을 하든 나부터 건강하고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철 없는 바람을 갖게 된다.

건강한
독립적인
따뜻한
친절한
상냥한
고요한
밝은
맑은
여유로운

 그리하여 나는 이번 생이든 다음 생이든 '건강한 몸과 정신으로 독립적인 생활을 하면서도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으며 따뜻하고 친절한 성격으로 타인에게 상냥하며 고요한 마음으로 세상에 밝고 맑은 영향력을 전달하는, 그리하여 나 또한 행복한 사람'이고 싶다. 써놓고 보니 (쉽게 부정하고 투정하는 내가 이르기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겠으나) 마음먹기에 달린 일이라 다음 생에 어떠한 직업을 갖고 싶다는 소망보다는 현실성이 있지 않을까. 겁 없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단언컨대 있을 지도 모르는 다음 생을 기대하기보다 터무니 없이 많은 전제가 깔린 어떤 상태에 이르고야 말겠노라고 마음을 다져본다. 고통과 결핍이 난무하는 삶의 전쟁통 속에서 보이지 않는 적과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을 이겨내고 끝끝내 영원하지도 못할 행복에 이르겠노라고, 결코 투지로서는 이루어낼 수 없는 꿈을 쟁취하고야 말겠다는 포부를 다져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