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생 커플의 임신, 출산 그리고 육아 - 3 주차
[런던 BPP 대학교 지하 1층 휴게실]
'나 생리를 안 해'
한참을 말 꺼내기를 주저하던 여자친구가 어렵게 꺼낸 이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꼭 여자친구가 '드라마 속 대사를 따라 하고 있다.’라고 느꼈다.
뭐랄까.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대사와 무게가 느껴지는 차분한 말투. 드라마를 보던 중이었다면 나는 분명 '어쩜 이렇게 하나같이 뻔해. 한국 드라마가 다 그렇지.‘ 라며 흥미를 잃었을게 분명했다.
임신테스터기를 사러 홀본역 앞에 있는 boots에 걸어가는 동안 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이 상황이 드라마만큼이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져서 그랬을지도.
분명 콘돔 잘 사용했는데? 언제 그랬지? 임신이면 내가 무슨 말을 해줘야 하는 거야? 드라마에서처럼 손 꼭 잡아주면서 '우리 낳자'라고 해야 하는 건가? 낳을 거면 애는 어디서 낳고, 어디서 기르고... 그럼 우리 유학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터져 나오는 생각들을 애써 정리하고 나는 생리대 코너 한편에 있는 임신테스터기를 2개 사들고 휴게실로 돌아왔다.
뻔한 클리셰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임신테스터기 오차율이 5%이라 2개를 사 왔다며 똑똑한 척을 하는 나에게서 임신테스터기를 받아간 여자친구는 잠시 후 2줄이 선명히 보이는 임신테스터기를 보여주었다.
'임신테스터기 2줄이면 임신이 아니라는 건가?' 역시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본다. 상황이 절망적일 때는 더더욱 그렇다.
여자친구는 울었다.
멀쩡히 잘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우고 영국 변호사가 되겠다며 영국에서 법학과 학사를 다시 시작한 여자친구였다. 어림잡아도 수억이 들었을 4년의 유학. 그럼에도 변호사는 커녕 아직까지 응시자격조차 갖추지 못한 상황이었다.
더 이상 부모님께 생활비까지 손 벌리기가 미안해 서빙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했다.
그런데 고작 200일쯤 만난, 주방에서 일하는 남자 사이에서 아이가 생겨 버린 것이다.
휴게실에 있는 사람들 눈치가 보여 여자친구에게 밖으로 나가자고 제안했다.
근처 카페로 자리를 옮긴 우리 둘은 커피 두 잔을 앞에 두고 정말 '드라마'에서 처럼 아무런 대화 없이 앉아만 있었다. 잠시 뒤 큰 결심을 했다는 듯 고개를 든 여자친구는 '너도 유학 와서 어렵게 창업비자받았잖아 꼭 성공하겠다면서. 아이는 내가 낳아 키울게 너는 걱정하지 마'라고 말했다.
(뭐지 이 돌아이는? 네가 막장드라마 여주면 다야?)
분명 이 여자는 한국 영화나 드라마를 즐겨보는 것이 틀림없고, 막장 드라마 속 가련한 여주의 페르소나로 캐릭터 컨셉을 잡았음이 분명해 보였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막장 대사를 내뱉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무조건 아이를 낳자고 했다. 무책임하게 도망가지도, 지우라고 하지도 않을 거라고 말했다.
너는 계획대로 시험준비를 하고 나는 나대로 창업준비를 하면 되지 않겠냐고 했다.
우리한테는 40주 정도 시간이 있고(임신테스터기를 할 쯤이면 이미 3-4주는 지난 거란 상식조차도 몰랐다.), 그 사이 아기를 낳고 키울 집도 알아보면 되지 않겠냐며 여자친구를 안심시킬만한, 정확히는 막장 드라마에서 남주가 했을만한 말을 떠올려가며 두서없이 말했다. 여자친구 눈치를 보면서.
조금은 편한 표정이 된 여자친구는 조별과제의 조장처럼 앞으로 고민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쏟아내기 시작했다. 양가 부모에겐 알려야 할지, 병원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우리는 살림을 합쳐야 하는지 등등
우선 우리는 출산을 하고 육아를 할 '집'을 결정하기 전까진 지금처럼 각자의 집을 유지하기로 했다.
(우린 각자 다른 집에서 외국인들과 화장실, 주방을 공유하는 하우스셰어를 하고 있었다.)
여자친구 집이 있는 킹스크로스역 방향으로 걸었다. 이상하게 기분이 나아졌다.
내 옆을 걷는 여자친구가 이제 와이프가 된다는 신기한 상황에 더해 조금 전 남자로서 충분히 듬직하고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여줬다는 생각에 들어 스스로가 무척 대견했다.
부부가 되면 이별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안심도 됐다.
(나는 참 철딱서니가 없다. 와이프는 집에 가는 내내 무슨 생각을 하면서 걸었을까?)
우린 만난 지 200일 만에 아이가 생겼고 부모가 되기로 했다.
수중에는 방 세를 내고 남은 270파운드(약 40만 원)가 전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