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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래도 Dec 26. 2024

커피를 내리는 마음

주말이면 아침 일찍 커피를 내려 마신다. 그라인더로 커피를 갈아 여과지에 담고 뜨거운 물을 부으면 커피 향이 거실에 천천히 퍼진다. 잠은 진작에 깼지만 자리에 누워있던 아내가 방에서 한 마디 한다. "커피 향 참 좋네." 자기 것도 같이 내려서 가져오라는 소리다.

커피를 내리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커피콩은 말리고 볶인 후에 부서지고 갈려 가루가 된다. 평생 만든 향기를 가루 사이 틈으로 스며드는 더운물에 천천히 내보낸다. 커피는 ‘내린다'는 말을 쓴다. ‘우린다’ 거나 ‘다린다’는 말과는 느낌이 또 다르다. ‘내린다’는 말에서 중력에 순응하여 자신을 내놓고 아래로 내려와 커피로 태어나는 커피콩의 마음이 느껴진다.

커피를 마시며 CD를 넣어 가수 백아가 피아노 반주만으로 부르는 노래를 듣는다. 제목은 '아홉'. 그녀가 스물아홉을 지나며 만들었다는 이별에 대한 노래다. 올해 11월 초에 백아의 콘서트에 갔었다. 그녀는 이 노래를 부르다 눈물이 북받쳐 끝내 노래를 멈췄고 공연이 중단되었다. 잠시 정적이 흐른 뒤 그녀는 수건으로 얼굴을 한번 문지르고 처음부터 다시 노래를 시작했고 조금 떨리는 목소리였지만 무사히 노래를 마쳤다. “난 마음이 아려와요."와 "맨 끝에서 다시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요."라는 가사 사이에 어떤 슬픈 사연이 있는지 나는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 노래는 내가 겪었던 마치 아홉수 같은 이별의 순간들을 쓰다듬고 마음을 다시 처음으로 돌려놓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그 노래가 슬프면서도 참 좋다.

작가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읽었다. 광주민주항쟁에 시민군의 편에서 참가한 이들에 대한 작가의 고통스러운 서술이 마음에 깊은 여운을 남겼다. 작가는 마음이 어땠으려나 하고 집필 과정에 대한 그녀의 인터뷰를 보았다. 역시나 무척 힘든 작업이었다. 수많은 관련 자료집을 일일이 읽고 나서 고통 속에 하루에 세 줄 쓰고 한 시간 울고 멍하니 앉아있기도 하고, 오디오북 녹음 날에도 마음이 북받쳐 하루 종일 걸려 겨우 앞부분만 만들었다. 출판 후 한참 지나도 마치 직접 경험한 것처럼 글에서 벗어나지 못해 그냥 계속 그 슬픔을 안고 산다고 했다.


예술가는 우리를 대신하여 마음 깊이 내려가 고통 속 어두운 바닥을 긁어 글을 쓰고 노래를 만들고 그림을 그린다. 그들이 기꺼이 치열하게 창작에 몰두하며 전달하는 노력 덕분에 우리의 무뎌지고 닳은 마음은 조금 뾰족해지고 선명해진다. 커피를 내릴 때 부서져 가루가 된 커피콩이 몸 전체로 내보내는 향기 덕분에 좋은 커피가 된다. 앞으로 나도 조금 더 좋은 삶을 살아야지 생각하며 내가 쓰는 글에 담는 생각이 너무 얄팍하고 가볍지 않은가 반성한다. 주말 아침 커피를 내리며 이렇게 마음을 정리하는 시간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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