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어나더라운드’는 열정 없는 일상을 사는 코펜하겐의 고등학교 교사 4명이 술을 마시며 나누는 가설에서 시작한다. 인간은 최적 혈중알코올 농도에서 살짝(0.05%) 부족하므로 그만큼 채우면 삶이 창의적이고 활발해진다는 가설. 교사 중 마틴(매즈 미켈슨)은 검증을 위한 실험에 돌입하고 적당히 취해서 들어간 수업과 가족들과의 관계에서 다시 생기를 찾는다. 그것을 본 나머지 친구 3명도 실험에 동참하며 영화가 점점 흥미롭게 전개되는데, 영화 마지막 장면에 마틴이 술을 마시며 부둣가에서 추는 한바탕 댄스가 인상적인 영화다.
요즘 유튜브 영상을 자주 1.5배속으로 본다. 말이나 화면이 그 정도 빠른 것은 이해에 지장은 없지만 습관이 되니 가끔 정상 속도에서 답답함을 느낀다. 내가 속도를 조절하며 시간을 아낀다고 하지만 오히려 내 생활이 그 빠른 속도에 맞춰지며 마음이 쫓기는 느낌이다. 느긋함과 거리가 생기고 차분한 마음으로 지켜보기보다 미션을 달성하는 일에 급해진다.
한강 작가가 노르웨이의 미래 도서관 프로젝트에 참가하는 영상을 보았다. 그 프로젝트는 2014년부터 100년간 매년 작가 한 명을 선정하여 오슬로 외곽에 심은 나무 천 그루로 책을 만들어 2114년에 출간한다는 장기 계획이다. 한강 작가는 그중 다섯 번째 작가로 글을 써서 숲을 찾았다. 책이라는 매체가 사라질지도 모르는 긴 세월 나무들은 천천히 자라며 줄기에 그 시간을 담아낼 것이다. 문득 노르웨이 관련 예전 뉴스가 떠올랐다. 국영방송에서 슬로 TV라는 제목으로 일곱 시간 연속 기차가 달리면서 보이는 풍경이나 북극까지 유람선이 항해하는 일주일의 풍경을 내보내고 국민 대부분이 시청했다는 나라가 노르웨이였다. 느리게 간다는 것은 그렇게 해도 좋은 미래가 있다는 믿음을 기반으로 한다.
일본에서 여행을 다닐 때마다 느껴지는 정취가 있다. 아직도 잡지 광고가 여기저기 붙어있는 기차를 타면 역마다 나이 든 역무원이 기둥에 달린 종을 당겨 울리고 기차가 도착하고 떠날 때마다 천천히 머리 숙여 인사한다. 골목골목 낡고 오래된 상점이나 주황색 커다란 등을 달고 있는 오랜 주점이 손님들을 맞이한다. 일본에는 오래된 것, 느린 변화에서 느껴지는 편안함이 있다. 엊그제는 직원들과 오랜만에 회사 근처 맥줏집을 찾았다. 예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곳, 좀 이른 시간이라 한가한 그곳에서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으니 마음이 오랜만에 편안했다. 혈중알코올농도를 좀 많이 올려버렸디만 참 좋은 시간이었다.
삶의 속도를 유튜브 조절하듯 조금 낮추어 0.75배속 정도로 유지하면 어떨지 생각했다. 걸음도 조금 느리게 걷고 책도 조금 느리게 읽고 말도 생각도 조금만 느리게 하겠다는 마음을 가진다면, 시간의 기울기를 조금만 조절하면 나를 스치는 시간의 속도도 조절되지 않을까. 우리가 우리 몸 최적의 알코올 농도보다 살짝 낮게 살고 있다는 가설은 믿기 어렵지만, 나는 인류의 몸에 맞게 설정된 시간의 속도보다 지금 너무 빠르게 살고 있다고는 느낀다. 느리다는 말은 늘이다는 말과 통하는 것이라서, 시간에 조금 느리게 대응하면 반대로 삶의 길이는 더 늘어나지 않을까 싶다.
시간의 속도는 마음의 기울기에 달려있다. 기울기를 완만하게 하면 낮에서 밤으로 흐르는 노을의 아름다움이 보이고 서늘하게 얼굴을 스치는 초겨울 찬바람의 뒷모습도 보인다. 노르웨이 기차나 배에서 보이는 풍경을 좋아하는 이유는 삶도 어딘가로 흘러가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삶의 풍경은 스쳐 가며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우리는 대개 풍경보다 목적지에 집중하며 살아간다. 삶을 지금보다 살짝만 기울이고 느리게 간다 생각하면 그만큼 더 마음은 편안해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