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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vefaith Jun 10. 2023

뮤지컬 <시카고> 품위가 사라진 도시

* 뮤지컬과 영화 <시카고>의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그래서 포스터의 이 분은 누구인지 아직도 궁금하다 // 사진 제공: 신시컴퍼니

좋아하는 뮤지컬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인 시카고. 이전에 국내 출연진으로 공연을 봤지만 오리지널 내한 공연은 어떨지 궁금해서 오랜만에 보고 왔다. 하늘 아래 같은 시카고는 없는 모양이다. 



올댓재즈에 색소폰은 못 참는다 /   사진제공: 신시컴퍼니


이번 내한 공연의 특징은 무대 중앙에 악기들이 자리 잡았다는 점이다. 지휘자가 있는 자리에 출입구가 있어서 배우들이 그 사이 공간을 활용한다. 연주자분들의 솔로도 눈에 띄었다. 트럼펫, 트롬본, 색소폰 소리에 특히 귀가 즐거웠다.  


이미 내용을 알고 있어서 자막을 많이 보진 않았지만, 무대 양쪽에 한글 자막이 글씨체를 활용한 점이 인상적이었다. 다소 과격하고 적나라한 대사가 많았는데 그때마다 글씨체가 제각각이었다. 관객석에서도 연기와 자막을 보면서 웃음이 터지곤 해서 또 다른 재미였다. 


안무나 노래 모두 배우들이 부드럽게 소화했다. 특히 벨마는 절도 있거나 카리스마 있을 거라 예상했는데 귀여운 느낌이었다. 록시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는 절박한 안무도, 록시에게 뒤통수를 맞고 투덜대는 모습이 특히. 


공연을 보기 전에 넘버 중 <We both reached for the gun>에 변호사 빌리 플린이 거의 복화술을 하지 않아서 아쉬웠다는 평을 이미 보고 갔는데, 알고 있어서인지 생각한 것보다는 괜찮았다. 복화술로 표현했다면 빌리의 천연덕스러운 연기에 조종당하는 록시를 볼 수 있어 익살스러움을 살릴 수 있겠지만, 넘버와 복화술 중에 택일하라면 넘버에 집중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빌리가 처음 등장한 넘버 <All I care about>에서는 하얀 깃털 소품을 활용했는데 어릴 적 해봤던 부채춤과 대형이 비슷해서 속으로 반가웠다. 빌리의 휘황찬란하기 그지없는 넘버 중 가장 빛이 난다면 그건 깃털 덕이다.



우리나라에서 총기를 소유하고 사용하는 게 보편화되어 있었다면 언제쯤은 시카고와 비슷한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았을까. 시카고가 신기한 건 지루하거나 무겁고 진지한 부분을 부담스럽지 않게 다뤘다는 점이다. 살인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어찌 됐든 살인을 한 사람은 범죄자이고, 무슨 사연이 있었어도 범죄자를 너그럽게 보기는 힘들다. 죽이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과 실행에 옮기는 것 사이에는 큰 벽이 있다.


그러나 시카고는 다르다. 벨마와 록시, 이 둘의 사건은 단숨에 지워버린 하와이 파인애플 농장 재벌 상속녀를 보아도 살인은 자주 일어나고 엄청난 범죄로 다뤄지지 않는다. <Cell Block Tango> 넘버에서도 6명의 기혼 여성이 살인을 저질렀고 모두 'He had it coming. He only had himself to blame.'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나. 이 모든 건 상대방이 자초한 것이고 당신도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하면,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한다며 기가 차야 한다. 문제는 이 궤변이 제법 끌린다는 것이다. 그가 거짓말을 하고, 바람을 피우고, 하지 말라는 일을 했으며, 의심을 한 것도 사실이긴 하니까. 물론 그렇다고 죽을 짓을 했다고 하는 건 비약인데도. 희한한 매력이다.



꿈은 어찌어찌 이뤄졌다  / 사진제공: 신시컴퍼니


시카고에 단 하나의 주인공이 있다면 그건 록시다. 꿈을 가지고 장난친 프레드는 그녀가 쏜 세 발의 총성에 사라졌고, 남편 에이머스와도 헤어졌다. 신문에 오르내리면서 잠깐이지만 인기를 누렸고 나중엔 그 벨마 켈리와 함께 바라던 쇼 공연을 하게 되었으니까. 그건 그녀는 금방 배워서 응용까지 하는 성장형 캐릭터였기 때문이다. 빌리 플린에게 진실보다는 자극적인 연기가 사람들과 재판에서 유리하다는 걸 배웠고, 벨마가 재판장에게 하려던 전략까지 모두 흡수했다. 그 결과가 한 술 더 떠서 없는 아이를 만들어서 시들어가는 인기에 다시 불을 붙이기까지 하는 모습이다. 빌리는 웃고,  벨마는 욕을 하고, 마마는 물건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답이 없어 보이는 내용 같지만 의외로 교훈적이다. 인기는 잠깐 반짝이는 것이고 아무것도 영원하지 않다. 진실이 외면당했을 때 무고한 희생이 일어나기도 한다. 얄밉기도 하다. 벨마와 록시는 신문 1면에도 날 정도로 인기몰이를 했고, 마마와 빌리 플린 덕분에 무죄로 새로운 삶을 얻었다. 하지만 카탈린은 헝가리인이고, 아무도 관심 갖지 않았기에 47년 만에 최초로 교수형을 당했다. 돈과 아름다움이 없다면 벨마와 록시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살인을 저지른 죄수조차 자신의 재판 혹은 형벌 앞에선 두려움에 떨었다. 다른 사람을 죽일 때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두려움이 그녀들을 찾아온 것이다. 


더 크게 생각해 록시, 넌 스타야 // 사진제공: 신시컴퍼니


록시는 빌리 플린 덕분에 다시 태어났다. 닭 농장에서 태어나 도덕과 보건 과목을 잘했던 록시는 부유한 남부에서 태어나 수녀원에 갔다가 사랑의 도피를 한 사연의 주인공이 되었다. 프레드와 록시는 동시에 총으로 손을 뻗었고, 운이 좋게 록시가 총을 먼저 쥐어서 쏜 것뿐이라는 알리바이는 언론에 설득력을 얻었다. 록시는 갑작스럽게 얻은 인기에 푹 빠져서 멋진 남자 배우들에게 둘러싸인 자신의 미래에 꿈이 부풀어있다. 환상 속에 사로잡힌 록시가 푼수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잔인하게도 느껴진다. 죽은 프레드는 안중에도 없으니까.


빌리는 최종변론에서 프레드를 되살리고 싶지만 그는 이제 돌아오지 않는다며, 뉘우치고 있는 록시에게 기회를 한 번 더 줘야 한다고 했다. 죽은 사람은 이미 죽었고, 죽은 사람 때문에 산 사람을 죽일 필요가 있냐는 말이다. 재판을 보는 사람 중에 죽은 그 사람의 가족이나 친구가 있었다면 마음이 찢어지는 말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진심으로 뉘우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 사람에게.


빌리는 어느 환경에서도 잘 살아남을 것이다. 언제까지 모든 재판을 서커스로 넘길 수는 없을 것이고, 언론을 이용하고 배심원들을 서커스처럼 현혹하는 건 그게 재판을 매번 승소하게 하는 전략이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인 것처럼 연기하지만 5천 달러 착수금 단 하나로 움직이고 이기는 싸움만 한다. 좀 더 정의로운 게 먹히는 시대가 온다면 그는 언제든지 정의로운 표정을 하고 열변을 토하고 있을 것이다. 록시도 얄밉지만 빌리는 지능적이라 좀 더 얄밉다. 그래서 누군가에겐 가장 좋은 변호사일지도 모르겠지만.



얄미운 것으로 치자면 마마는 얄밉지 않냐고? 빌리에 비하면 교도소 간수인 그녀는 솔직하다. 마마에게 잘한다면 너도 역시 덕을 볼 거라는 상호성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녀와 벨마가 조금은 다시 보이는 넘버가 있다. 영화에는 편집됐지만 공연에는 있는 넘버 <Class>. 이 넘버에서  진짜 시카고가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가장 진솔하게 담겨있다.


마마와 벨마가 부릅니다 '클래스' / 사진제공: 신시컴퍼니
Whatever happened to fair dealing 
And pure ethics
And nice manners?
Why is it everyone now, is a pain in the ass?
Whatever happened to class? 

Class...
Whatever happened to "Please, may I?" 
And "Yes, thank you." 
And "How charming?"
Now every son of a bitch, is a snake in the grass 
Whatever happened to class? 

Class...
Oh, there ain't no gentleman to open up the doors
There ain't no ladies now,
There's only pigs... and whores
And even kids'll knock ya down so's they can pass.
Nobody's got no class...

Whatever happend to our old values? 
And find morals? 
And good breeding?

Now, no one even says "Oops!" when their passing their gas!
Whatever happened to class? 

Class...
Oh, there ain't no gentleman that's fit for any use.
And any girl'd touch your privates.. for a DEUCE!
And even kids who kick your shins and give you sass!
(And even kids who kick your shins and give you sass)
Nobody's got no class...

All you read about today is rape and theft!
JESUS Christ!
Ain't ther no decency left?
Nobody's got no class!

Every guy is a SNOT!
Every girl is a TWAT!
HOLY SHIT!
HOLY SHIT...
What a shame!
What a shame...

What became of class?

아무도 품위를 갖추지 못했다. 온갖 범죄 소식만 넘쳐난다. 여기서 말한 품위란 건 신분이나 부유함보다는 신뢰와 존중, 예의에 가깝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비판하고 있지만, 벨마와 마마는 자기 자신 역시 포함했다.  한 명은 범죄자를 도와주고, 한 명은 범죄자이니까. 아무것도 영원하지 않다고 했지만 바로 그 덕에 시카고의 모든 사람은 언제 그랬냐 하듯이 새 출발을 할 수도 있다. 마마는 교도소의 '마마'로 건재하고 벨마와 록시는 '시카고를 들썩인 킬러 시스터즈'로 재기해서 그들의 공연에 사람들이 환호한다. 처음부터 한 몸이었던 것처럼 합이 잘 맞는 그들은 쇼 비즈니스에 안성맞춤이다. 둘이 여러분 덕분이라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다. 


벨마가 증인이라고요?

영화에서는 뮤지컬과 약간 다르다. 뮤지컬에서 록시의 재판은 큰 어려움 없이 끝나고 역시나 우여곡절 없이 벨마와 공연을 하는 것으로 끝난다. 영화에서는 그 사이 생략된 서사를 만들어 넣었다. 막판에 록시의 일기장이 증거물로 등장하고, 벨마가 증인으로 출두한다. 록시가 다시 기회가 생겨도 프레드를 죽이고 싶다는 말을 하면서 소소한 복수를 하는데 아쉬울 건 없다. 실제 록시가 쓸 법한 말이라 거짓말도 아니니까. 오히려 빌리는 증거물로써 일기장이 신뢰할 수 없다고 의심을 제기하고, 검사가 일기장을 날조한 것처럼 몰아가기까지 한다.


이렇게 될 줄 알았는데(상상은 자유)

록시는 혼자서도 잘할 수 있다고 큰소리쳤지만 번번이 퇴짜를 맞았고, 서로 궁지에 몰린 벨마와 록시는 서로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함께 무대에 서게 된다. 둘의 공연에서 놀랍게도 둘은 마지막에 총을 가지고 나와서 쏘는 시늉까지 하는데, 사람들은 오히려 그걸 보고 즐거워하는 게 묘미다.


영화에서 메리 선샤인은 만만치 않은 사람이지만, 뮤지컬에서 메리 선샤인은 곧이곧대로 믿는다는 점도 큰 차이다. 메리 선샤인의 창법이 많이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마지막에 비밀이 하나 밝혀져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뮤지컬에서 메리 역에 남자배우들이 자주 배역을 맡고 있다고 한다. 플린 씨가 심어놓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여전히 영화 시카고의 올댓재즈는 최애다

시카고는 현실이었다. 모린 달라스 왓킨스가 뷸라 아난과 벨바 게트너의 살인 사건을 토대로 시카고의 원작 희곡 <A Brave Little Woman>을 썼다. 이상하게도 지금도 만만치 않게 많은 범죄가 뉴스로 오르내린다. 이별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살인을 저지르기도 하고,  뜬금없이 전혀 모르는 사람을 해치기도 한다. 살인을 했어도 예쁘면 인기가 있다는 게 현실에선 없을 일 같다기엔, 공개 단톡방 등으로 범죄자를 옹호하는 경우가 최근 기사에도 있다. <All That Jazz>를 여전히 좋아하지만 이번 내한 공연을 통해서 <Class> 넘버를 잊지 못하게 된 건, 아마 넘버가 좋아서만은 아닐 것이다. 여전히 시카고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품위가 사라진 도시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 이 리뷰는 아트인사이트와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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