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아프다고 하는 게 나에게 관대해질 수 있는 기회
공황 진단을 받은 지 5년쯤 되었고, 공황 진단 이전에도 힘들 경우에는 공황 증세를 경험하였다. 대표적인 증세는 과호흡과 헛구역질이었으며, 심각할 때에는 식욕부진(평소엔 식욕과다이지만 정말 가끔 부진이 온다)과 이인증(내가 내가 아닌 것처럼 느끼는 상태라고 네이버 지식백과에 나오지만, 내가 경험한 경우는 그냥 내가 유체이탈되어서 내 몸의 조절력을 상실한 듯한 기분), 그보다 더 심각할 경우에는 자해 충동이었다. 자해 충동은 ‘내가 내 몸을 해쳐서 죽어야겠다!!!’ 이러한 다짐이 없더라도 충분히 발생할 수 있다. 나의 경우, 그냥 그렇게 해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 몸을 움직여 약통을 집어 들게 한다거나, 설거지하다 보이는 식칼이 더욱 날카롭고 예리하게 보이는 정도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황 증세 혹은 우울증세가 있다고 하면 ‘마음이 약해서 그래.’라고 이야기한다. 나 역시 가장 많이 들은 이야기가 ‘마음을 강하게 가져야 해. 앞으로 이보다 더 힘든 일들이 많아.’라는 말을 가장 많이 들었다. 그런 말들을 반복적으로 듣다 보니 나 역시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가 마음이 나약한 사람이라고 받아들였다. 그래서 더 독한 척하려고 애도 쓰고 쎈 언니로 보이기 위해 어투나 옷차림까지 ‘남들의 눈’에 걸크러쉬처럼 보이려고 애썼다. 그 결과 우울증 및 공황 진단은 공황 및 조울증으로 바뀌었다.
이쯤 되면 단순히 마음을 강하게 먹는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지금부터 어떤 메커니즘으로 우울증이라는 것이 혹은 공황이 발생하는지 이해해볼 필요가 있다. 불행히도 나는 전문가가 아니기에 그냥 나의 이야기를 간단하게 써보려고 한다.
애초에 나는 걱정도 많고 쉽게 긴장하는 성격이 소유자였다. 걱정과 긴장을 왜 하는지 들여다보면, 무언가 실수나 실패가 두려웠던 것이 컸다. 실패하면 안 된다, 실수가 있으면 완성되지 못한다. 그 실수나 실패를 쉬이 넘기지 못하는 것은 실수 하나하나를 쉬이 넘기지 못하는 완벽주의자였던 것이다. 이러한 완벽주의적인 성향은 여러 가지 환경적 이유 또는 사건으로 인해 발생하니까 그것까지 자세하게 살펴보기는 패스.
그런데 문제는 살면서 실수와 실패라는 것이 발생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소설이나 드라마 속에나 완벽한 인간상이 나오는 것이지, 사람들은 매 순간 실수하고 매 순간 실패를 경험하면서 살고 있다.(드라마 속 그들도 때로는 실수하며 멍뭉미를 내뿜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직장에서 혹은 사회에서 순간의 실수와 실패를 용납받지 못하고 미친 듯이 욕먹으며 산다. 그래서 ‘욕먹기 싫어서’ 혹은 ‘질타당하기 싫어서’ 일말의 티끌도 잡히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나의 생각과 마음을 닫아두고 상대방의 기분을 살피고, 동시에 책 잡히지 않기 위해 끝없이 스스로를 검열하고 일에 몰두하니 내 마음이 매몰되고 마는 것이다.
매몰되고 낮아진 자신감은 낮은 자존감으로 연결되기 마련이다. 낮은 자존감으로 직장 생활을 임하고 끝없이 밀려오는 일을 해나가는 나에게 공황이 오지 않고는 말이 되지 않았다. 자존감이 낮다는 것이 상상 이상으로 낮은 상태를 말했지만, 회사에서는 웃는 얼굴로 다녀야 했기에 직장에서는 웃고 집에 와서는 우는 생활이 계속되어 결국 병가를 내고 쉬게 되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잘해야 한다.’라는 압박적 상황에서 벗어나니 공황 증세가 상당수 많이 완화되었다는 점이다. 동시에 나 스스로도 ‘지금은 쉬는 상황이잖아. 잘할 필요가 뭐가 있어.’ 이렇게 생각하기 위해 노력하고 실제로도 대충 하다 보니 오히려 글쓰기의 결과가 더 잘 나오고 있다. (적어도 양적인 측면에서의 성과는 확 늘었다.) 어차피 아픈 사람이 이만큼 쓰면 잘한 거지 뭐. 이렇게 위안 삼는 게 남들 눈에는 안쓰러울지 몰라도, 나에겐 정말 큰 위로였다.
이쯤 되니 슬슬 드는 발칙한 생각
차라리 아프면 내가 나에게 관대해지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주변에서 공황을 완치했다는 사례는 보지 못한 것 같다. 그저 공황 상태에 빠졌을 때 그 상황에서 요령껏 나오는 방법을 터득할 뿐이었다. 그리고 ‘공황이 완치된 양’ 그저 그렇게 하루하루를 다시 살아가는 것뿐이었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티스의 비밀상담소(원제는 SEX EDUCATION)’에 보면 부모로부터의 기대에 압박감에 시달리는 인물이 스스로 운동기구의 추에 자신의 손을 집어 스스로의 몸을 해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깁스를 하고 쉬는 동안은 충분히 압박감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생활을 이어가지만, 다시 깁스를 풀고 자신이 잠시 벗어나 있었던 삶에 돌아가야 하는 순간 다시 압박감에 시달리는 모습을 보이고 다시 자해하려 든다. 이 역시 부모의 완벽주의가 자식에게 미치는 영향을 보여주는 사례이자, 스스로가 아픈 사람이라고 인식하는 것이,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인지 보여준다.
완벽한 사람일수록 자신이 아프다는 사실을 쉽게 인정하기 어렵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몸과 정신에 문제가 생겼다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는 것부터 어렵다. 게다가 마음이 지친 상태임을 무의식 중에 느끼면서도 끊임없이 무엇인가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감을 이겨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라리 ‘공식적으로’ 아픈 상태라면, ‘모두가 납득해줄 수 있는’ 아픈 상태일 때만 마음이 말랑해지는 것이다. ‘그래 나 지금 아프지. 좀 쉬어도 돼.’ 이런 핑계를 스스로 만들어내지 못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공황을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완치를 원하면서도 동시에 완치 후를 두려워하는 모순적인 상황에 놓이면서 치료가 더욱 어려워지는 것은 아닐까?
라고 길고 긴 자기변명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