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7월에 1억을 모았다. 서른이 되기 전에 꼭 1억을 모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한국 나이로 스물일곱에 큰 목표를 달성하니 신기한 기분과 함께 약간의 허탈함이 들기도 했다. 부모님이 어렸을 때부터 내 이름으로 저축해 놓은 돈을 포함해서 1억이 된 것이지만 올해 3월이 되면 부모님 도움 없이도 1억이 넘어가기 때문에 글을 올리려 한다.
왜 꼭 1억을 모으고 싶었을까? 그 정도는 되어야 시드머니로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부모님에게 자랑스럽게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1억을 모으는 과정은 내게는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잔액이 쌓이는 통장을 볼 때마다 지금의 삶이 헛된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1억을 모은 것이 대단한 일인 것은 절대로 아니다. 나는 앞서 말했듯이 부모님이 도움을 주었고, 내가 자발적으로 선물한 돈을 제외하면 가족에게 들어간 비용이 없는 행운을 가졌다. 대학교 역시 등록금이 극도로 저렴했기 때문에 학자금 대출을 갚을 일도 없었다. 관사에 살기 때문에 월세도 세이브할 수 있었고 아직 차가 없기 때문에 관련 비용도 들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사실 아껴 쓰기만 한다면 어렵지 않게 돈을 모을 수 있다.
원래는 저축을 많이 하는 편이 전혀 아니었다. 소득이 많은 편도 아니었다. 성인이 되고 나서 아르바이트나 과외, 학원강사 등의 노동은 그만둔 적은 없지만 성향 자체가 소박하고 돈에 관심이 없어서 일을 늘리지는 않았다. 스물둘이 되었을 때 1년 간 휴학을 하게 되었다. 무엇을 할지 정하지 않고 그저 쉬고 싶어 결정한 휴학이었다. 재미있게 쉬려니 돈이 필요했지만 그전에 번 돈들을 모두 탕진한 나에게는 말 그대로 땡전 한 푼 남아있지 않았다. 자잘한 아르바이트를 하며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삶에 진한 현타를 느낀 나는 그때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22살 7월부터 적극적으로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학원에 취업하는 동시에 그 당시 흔치 않았던 화상과외를 포함하여 과외를 최대한으로 늘렸다. 남는 돈이 생기자 저축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적극적으로 들었다.
그때 270 정도 벌었는데 100만 원은 다른 통장에 옮기고 쓰지 않았다. 그때는 파킹통장 같은 개념이 생소했는데 만약에 파킹통장이 있었으면 활용했을 것 같다(있었는데 몰라서 못 쓴 것일 수도 있다). 나머지 돈은 다음 월급날까지 사용하고, 남는 돈은 또 다른 통장에 옮겼다. 돈이 어느 정도 모였을 때 적금을 붓기 시작했다. 모아놓은 돈을 다 적금 통장에 넣어놓고 사용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지금도 같은 방식으로 돈을 모으는 중이다. 200만 원 중반의 월급을 실수령하면 200만 원을 다 저축하고 있다. 청년희망적금에 50만 원을 꽉 채워 넣고 그 외 이율이 괜찮은 적금을 두 개 들고 있다. 그러면 100만 원이 남는데 그건 파킹통장에 넣어놓고 1000만 원에 가까워지면 예금으로 묶어놓는다. 남는 돈으로는 재미 삼아 26주 적금이나 챌린지박스 등을 통해 저축을 하기도 한다.즉 기본적으로 돈을 쓰지 못하게 묶어놓는 것이 핵심인 것이다.
그럼 생활비는 어떻게 충당할까? 200만 원을 저축하면 솔직히 남는 금액이 크지 않다. 거기에서 급식비, 통신비, 전기세 및 기타 관리비, 보험료, ott 등 구독료, 본가에서 키우는 고양이 양육비 등 고정지출을 제하면 남는 돈이 더더욱 없다.
지출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관리한다.
첫 번째. 나만 안 쓰는 부분: 다수의 사람들이 지출하지만 나는 지출하지 않는 분야이다. 내 지출도 아닌데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차후에 나갈 수도 있는 비용이기 때문에 미리 고려하기 위함이다.
- 자동차 관련 비용(아직 차 없이 잘 살고 있음), 월세 및 보증금(관사 이용 중), 각종 대출이자(성격 상 대출은 커녕 물건 하나를 사도 할부 없이 사게 됨), 운동 관련 비용(운동할 시간 없음... 언젠가 해야겠지만), 유흥비(내향인이라 친구 잘 안 만나고 만나도 크게 돈 쓰지 않음), 품위유지비(미용실 1년에 두 번 가서 커트만 함, 화장 거의 안 함, 옷 너무 많아서 더 못 삼, 네일아트는 셀프로 함, 비싼 브랜드나 명품에 관심 없음)
이 부분은 다 쓰면 1억은 고사하고 마이너스 통장의 길로 빠질 것 같다.
두 번째. 나만 쓰는 부분: 취미 생활 등 남들은 잘 쓰지 않는데 내 소비 중에서는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분야이다. 이게 내 저축을 방해하는 문제적 부분이지만 이런 데 돈을 안 쓰면 돈을 버는 의미가 없다. 하지만 점차 줄여야겠지...
- 앨범구매(시디 모으는 걸 너무 좋아한다. 한 달에 5~10장씩은 꼭 구매하고 좋아하는 아이돌이라도 컴백하는 달엔... 더 보기), 신발구매(특히 재작년에 엄청나게 삼), 포토카드구매(아이돌에 미친 사람입니다), 공연 및 영화관람료(1년에 10개 이상의 공연을 가지 않으면 큰일이 발생한다. 영화도 자주 보는 편), 자질구레한아이템구매(인센스, 위스키, 예쁜 글라스, 싸구려 반지 같은 거 엄청 산다), 여행비용
2번 항목은 유난히 변명으로 가득 차 있는 걸 볼 수 있듯이 줄이려고 해도 줄이기 영 어려운 부분들이다. 당장 나가는 금액들이 크지 않아 더욱 간과하게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앞으로는 해당 분야에 대한 지출을 더 줄이고 미니멀하게 살아보려고 한다.
세 번째. 고정인 듯 고정 아닌 고정 같은 부분: 고정 비용을 포함하여 인간으로서 살기 위해 써야 하는 부분들이다.
- 앞서 서술한 고정지출, 식비, 생활용품구입비, 각종 경조사비
꼼짝없이 지출해야 하는 부분들 밖에 없다.
아무튼 위와 같이 정리를 해놓고 첫 번째 부분은 안 쓰기 위해 노력한다. 두 번째 부분은 생활에 지장이 가지 않는 선에서 지출한다. 월급으로 모자랄 경우 잘 꿍쳐놓은 명절휴가비, 방과 후 수업급여 등의 비상금통장에서 빼서 충당한다. 이렇게 빼서 사용한 금액은 잘 적어놓고 여윳돈이 생기면 다시 비상금 통장에 넣어놓는다. 세 번째 부분은 아까워하지 않고 쓴다. 고정지출은 줄일 수 있으면 줄이지만 경조사비 같은 건 아끼는 순간 사회적으로 중상을 입을 수 있다.
1억이 모이는 순간의 기분은 말 그대로 복잡했다. 앞서 적은 것처럼 기쁜 건 물론이었고 생각보다 쉽게 이루어진 것 같아 허탈하기도 했다. 그동안의 노력들을 생각하면 절대 그냥 이루어진 목표는 아니지만 막상 그 금액을 보고 나니 내 돈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1억이 모여도 내 생활과 씀씀이에는 변화가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1억이 모이고 나니 주택 매매, 투자 등 더 장기적인 플랜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더 많은 돈을 모을 수 있는 추진력도 생겼다. 돈을 모으는 과정에서 효율적인 저축 방법도 체득하게 되었다. 1억을 모으는 중이라는 사실을 누군가에게 밝힌 적은 없지만 극도의 저축을 하는 것을 아는 주변인들은 나에게 항상 부정적인 이야기를 했다. 젊을 때 욜로 해야 한다, 결혼도 안 할 건데 돈 아껴서 어디다 쓰냐, 티끌 모아 티끌이다, 부수입 없이는 돈 안 모인다 등의 말들이었다. 나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었지만 내 삶의 방식을 혼란스럽게 하는 말들이기도 했다. 이제는 그런 말들에 흔들리지 않고 내 방식대로 살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