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물고기 Oct 09. 2022

잃었지만 얻을 수 있어

통증이 시작되고 한 달도 되지 않아 나는 이미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것들을 아주 오랫동안 다시 되찾지 못하리라는 것을 운명적으로 직감하고 있었다. 봄, 나들이, 공원, 노래, 기타, 꽃, 나무, 하늘, 공연, 구름, 산책, 여행, 음악.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종이에 한가득 적어 벽에 붙여놓고 매일 보았다. 그리워하며 언젠간 다시 보고, 하고, 느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 말고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창밖엔 봄이 왔는데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던 날들이었다. 나는 창문 안쪽에서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뛰어다니는 아이들, 즐거워 소리치는 사람들, 통통 튀는 공과 봄의 활기를 바라봤다. 가만히 앉아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


나는 오늘도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한 채
이렇게 그저 울고만 있어
멀어져 가는 꿈들
멀어져 가는 모습
한때는 가졌던 것
이제 더 이상 갈 수 없는 곳

아프기 전을 그리워만 했다. 내가 돌아가고 싶은 건 아프기 전의 내 몸이었다. 창밖의 사람들을 보며 나도 그들처럼 돌아다닐 수 있었던 과거를 떠올렸다. 하지만 자꾸 뒤만 돌아보면 앞으로 갈 수 없다. 아프기 전의 나와 비교하면 나는 항상 좌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건 나아지는 방법이 아니었다.


“과거를 생각하면 안 돼요. 예전에 얼마큼 했는지 생각하지 말고 지금 몸 상태를 받아들이세요. 아프기 전이랑 비교하지 말고 한 달 전, 일주일 전과 비교하세요.”


어느 날, 운동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내가 여전히 과거에 매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의 말을 듣곤 빗속에 버려진 아이처럼 엉엉 울어버리고 말았다. 나는 아직도 과거의 나를 놓지도 현재의 나를 받아들이지도 못하고 있었다. 과거를 잊고 현재에 집중하고 싶었지만 이전의 삶이 한 번에 놓아지지 않았다. 그걸 어떻게 하는 건지 몰라 계속 그렇게 살고 있는 것 같았다. 아픈지 수년이 됐는데도 나는 여전히 내가 잃은 것 사이에서 헤매고 있었다.



그 후로 더 많은 시간이 지나자 내가 떠나온 것들에 대한 감각이 옅어졌다. 아프기 이전으로 돌아가기보단 지금 상태에서 나아진 새로운 몸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지난 몇 년 간의 경험으로 알았다. 아프기 이전의 나는 없다. 나는 아픈 시간도 살아낸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계속 제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만은 없었다. 뒤만 돌아보다 앞으로 갈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나는 예전의 나를 놓아주기로 했다. 치지도 못하면서 덩그러니 놓여있던 기타를 케이스에 넣었다. 지금 나의 상태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일주일 전의 나,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비교하기 시작했다.

  재활 운동을 시작하고 일 년이 지나자 몸의 통증이 많이 사라졌다. 나는 일 년 전, 이년 전의 나와 비교하며 나아진 모습을 다행이라 생각하게 됐다.


그러다가도 아픈 시간이 길어지는 어느 날은 서러움이 북받쳐 올라 울면서 소리치기도 했다.

“나 서른셋이었는데 왜 갑자기 서른일곱이야? 그냥 눈 한 번 깜빡한 건데 왜 이렇게 됐어? 난 왜 계속 아파?”

그런 날이 있었다. 시간의 흐름이 서러워서 펑펑 울고 그다음 날부턴 울음을 뚝 그쳤다. 잃은 것에 대해선 그만 생각해도 될 것 같았다. 이제 그만 놓아줘도 될 것 같았다. 나의 아프기 전 몸은 사라졌지만 아픈 이후의 몸으로 내 삶은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들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과거만 붙잡고 있는 것은 그만하기로 했다. 지나간 시간을 후회하고 억울해해 봤자 결국 내 마음만 아프다는 걸 알았다. 나는 앞으로만 가고 싶었다.


편두통이   넘게 가시질 않아 텔레비전을 완전히 끊기로 결심했다. 마지막으로  드라마 스물다섯스물하나에서 백이진은 나희도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항상 잃은 것에 대해서 생각해. 근데 넌 얻을 것에 대해 생각하더라. 나도 그러고 싶어 졌어. 희도 너처럼.’


나는 그 순간에 정지했다. 내가 더 이상 하지 말아야 할 것, 앞으로 해야 할 것이 그 한 마디에 모두 들어있었다. 나도 그러고 싶어졌다. 얻을 것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싶어졌다. 지나간 나의 과거를 생각하며 아쉬워하거나 가슴 아파하는 일은 다시없고 싶었다.


나는 오랫동안 잃은 것에 대해 생각했다. 하지만 더 이상 내 손에 쥘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앞으로 내가 이루고 싶은 것들에 대해서만 생각하기로 했다. 후회와 연민과 상실에 대한 애도는 충분했다.


내가 예전에 얼마나 활동적이고 얼마나 생기 넘쳤는지를 잊진 않았다. 그 시절을 모두 기억한다. 나는 건강했던 나를 잃었다. 그립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본다. 내가 얻을 새로운 나의 모습을 생각한다. 어제보다 조금 더 나아질 오늘을 바란다. 잃었지만 괜찮다. 새로이 얻을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명절에 고향에 가고 싶은 마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