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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일제문소 Jan 27. 2024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그리고 잘생긴 설악산

스타트업계의 흥선대원군(?)답게 워케이션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는 코웃음을 쳤다. 아니 워크면 워크고 베케이션이면 베케이션이지 요즘 젊은이들 별 걸 다 만드네 하고 남일처럼 지나쳐버렸다. 사실 작은 규모의 회사는 저런 복리후생을 챙기기가 어렵다. 그래서 나에겐 더 남일이었고, 저런 건 젊은 친구들을 꼬시기 위한 유니콘 스타트업들의 개수작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회사에 와보니 워케이션이라는 제도가 떡하니 있는 것 아닌가. 당장 하루하루를 걱정해야 하는 이 작고 귀여운 회사가 무슨 팔자 좋게 워케이션인가 싶기도 했지만 우리는 여행 브랜드니까 또 아예 맥락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튼 이 제도를 아주 잘 이용하는 팀원이 있어서 지난 12월 동료들 몇 명과 작당을 하고 고성 맹그로브에 처음 와봤다.


맹그로브 고성


결과는 나도 대만족. 신문물의 맛을 보고 컨셉에 안 맞게 김옥균이 될 뻔했다. 2박 3일의 짧은 워케이션이었지만 사무실에서의 워킹데이 기준 5일 치의 생산성을 뽑았달까? 대면미팅 같은 것들은 어렵지만 그런 부분이 아니라면 뭔가 집중해서 결과물을 내야 할 때는 꽤 괜찮은 제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젊은이들이 많이 하는 건 다 이유가 있다. 끼워주면 열심히 따라가고 경험해봐야 한다. 이번 워케이션도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올해 사업 목표도 세워야 하고 회사의 큰 축이 되는 일들을 고민해야 하는 상황이라 사무실에서의 복닥거림에서 약간은 거리를 두었어야 했는데 딱 적당한 시간이었다. 사실 회사가 너무 바쁜 시기여서 눈치도 보이고 취소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지만 역시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보라 동해에 떠오르는 태양 - 숙소의 아침


위에서 말한 유니콘 대감집에 다니는 예전 회사 팀원과 함께 내려와 일도 하고 밥도 먹고 바다도 보고 많은 얘기도 나눴다. 예전 회사 팀원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우리는 이제 진짜 친한 친구가 되었지만 우리에게 닥쳤던 어려운 시간들이 다 지나가고 그때처럼 바로 옆자리에서 일을 하고 있는 그 상황에 말할 수 없는 감정이 들었다. 그 시간을 잘 견디고 각자의 자리에서 또 최선을 다하고 있는 우리가 대견하기도 하고 이제 다음 스텝을 고민하고 있는 친구의 모습을 보면서 내가 했던 고민들이 떠오르기도 하고, 눈앞에 펼쳐진 바다가 주는 오늘의 즐거움에 앞서 여러 감정들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우리는 그 누구보다도 오늘의 소중함을 잘 알고 감사하는 사람이니까 3박 4일의 시간을 기쁨으로 채웠다.


우리 존재 오늘도 무사히, 쨘


연말부터 고민했던 일들도 저 멀리 파도에 다 태워 보냈다. 이번에 둘이 마주 앉아 ‘사는 게 별게 없다’라는 말을 참 자주 했다. 자조적이고 비관적인 의미보다는 늘 승모근에 힘이 바짝 들어가 있는 우리 두 사람에게 주는 느슨함이랄까. 이제는 눈앞에 펼쳐진 푸른 바다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주어진 일상을 부지런히 살다가 보는 바다가 더 좋다는 것도 안다. 예전보다 많은 것을 알게 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조금 실망하더라도 뒤로 깍지 끼고 말려있는 어깨를 쭉쭉 펴면서 최선을 다해보는 일, 그것뿐이 아닐까. 그리고 지금의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들이 곁에서 건네주는 따뜻한 말들로 나를 채워 울먹거리게 되는 시간을 넘겨보는 것, 그뿐이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한적하지만 파도가 바빴던 고성의 바다는 나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바다와 파도를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김연수 작가는 어쩌면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이라는 제목을 지었을까. 가정법(?)으로 문장을 맺어놓지 않으니 자꾸 쉼표 찍고 그 뒤로 파도처럼 내가 해야 하는 일을 대답해야만 할 것 같다. ‘너를 사랑하는 것은 나의 일이었다’처럼 멋진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쑥스러운 나는 또 먼산을 보며 뒤통수만 긁적이고 있다. 그리고 바빴던 파도만큼이나 잘생긴 설악산에 반했다. 어릴 때부터 강원도에 한두 번 온 게 아닌데 마치 눈 덮인 설악산을 처음 보는 사람 같았다. 설악산은 암말 않고 가만히 있는데 나만 자꾸 플러팅 당한다고 착각하고 흘낏흘낏 보게 되는 그런 느낌이다. 언젠가부터 ‘기세’라는 표현을 많이 쓰게 되었는데 설악산이야말로 기세 그 자체였다. 작년 가을, 제주를 다 품어버린 듯한 한라산, 야트막한 오름들이 너무 좋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아무래도 이쪽인 것 같다.


미남 설악산


단단한 사람인 척하지만 그렇지 못하다는 걸 스스로 잘 알아서 그런지 뚝심 있고 짱짱하게 버티고 서 있는 무언가를 보면 괜히 내 마음이 놓인다. 사실 제가 이렇게 약한 사람이에요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안 보여준 속을 훤히 보여줄 기회만 엿보게 된달까. 아주 가까웠던 누군가가 나에게 ‘겨울산’ 같다고 얘기하고 떠나간 적이 있는데, 생각해 보면 그 사람은 나를 잘 몰랐던 것 같기도 하다. 나는 겨울산 속에 무서워서 웅크리고 있는 새끼곰일 수도 있는데(나도 양심이 있어서 사슴이라고는 안했다ㅋ). 나이가 들수록 나를 달래는 스킬이 조금씩 늘어 수월해지는 반면 나의 약점도 MRI 사진처럼 훤히 드러나 골치가 아프다. 어차피 숨겨지지도 않을 테니 주변 사람들한테 양해를 구하고 미안해하면서 적당히 부대끼고 살아야지.


올해도 변함없이 잘 부탁드립니다?


수족냉증과도 악수 - 문우당서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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