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밀 삶은 물처럼 따뜻하고 심심하게
퇴사자의 플랫폼이라는 닉네임(?)에 걸맞게 다시 입사자의 상태가 되니 도통 브런치에 글을 남길 여력이 없다. 시간이 없다, 체력이 안된다, 이런 건 말도 안 되는 소리고 생각의 똥을 싸...아니 글을 쓰고자 하는 강렬한 욕구가 잘 일어나질 않는다. 생각이야 늘 많고 하고 싶은 말도 많지만 그 여러 생각들 가운데 한놈을 잡고 시작해서 두부 만드는 틀 같은 데다 욱여넣어 두부 한 모를 내놓아야 하는데 일을 하다 보면 일 이외의 나머지 것들은 그냥 콩비지 상태로 머릿속을 둥둥 떠다닌다고나 할까.
게다가 인스타, 유튜브 등 신문물 덕분에 나는 이미 집중력 디폴트 상태에 빠져있으니 하나하나 빚어내는 글이 써지겠냐...(여러분, 이게 똥글 망글 같아도 나름 다 오래 고민하고 조직해서 쌓아 올리는 글입네다. 믿어주세요) 하지만 그럼에도 나에겐 새해맞이 3일의 연휴가 주어졌고, 마지막 휴일은 밀린 일을 좀 하려고 남겨뒀는데 사람이 살던 대로 살아야지. 늘 그렇듯 내일 울게 될 일은 내일의 나에게 맡기고 얼렁뚱땅 2023년 회고 + 우당탕탕 2024년 새해다짐을 해볼까 한다.
2023년은 감히 나 스스로 밥벌이를 시작한 이래 최초로 몸과 마음이 건강하고 무탈했던 해로 기록한다. 올해의 이벤트를 기억하려고 하는데 정말 뭐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이게 노잼인 듯하지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예전에는 몰랐다. 연말에 뼈아픈 피드백 몇 가지를 듣긴 했지만, 이것 또한 애정을 가지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어 감사한 것들이어서 상처처럼 지니고 있을 이유도 없는 것들이다. 앞으로도 올해만 같으면 좋겠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1년이었다.
맨날 아줌마들이랑 수다 떨러 가는 것 같아도 우리 가족을 위해 늘 기도하는 엄마와 자기가 만든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책임감 있게 끝까지 잘 지켜내려고 하는 아빠, 그리고 인생에서 제일 잘한 일이 장가간 일인 것 같은 동생, 그리고 1년도 안되어 원래 있던 가족처럼 느껴지는 동생의 와이프까지, 내가 아무리 열린 마음인 척, 정상가족 이데올로기 극혐 이러고 앉아있어도 결국 나의 가장 튼튼한 기반은 가족이라는 걸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깨닫는다. 본의 아니게 내가 아직도 가족의 근심거리로 남아있는 것 같지만 뭐 어쩌것슈 ㅋㅋ
그리고 회사 동료들을 포함한 나의 친구들. 내가 사람 때문에 마음이 힘들 일이 줄어 나도 모르게 좀 거침없어진 면이 있는데 그로 인해 누군가가 상처받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사실 하지 못했었다. 내년에는 이런 부분을 좀 더 신경 쓰고 다정한 사람이 되기로 약속한다. 그래도 꽤 두루두루 사람을 챙기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부분을 떠나 최초의 표현(?)인 말 한마디를 조금 더 다정하게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글을 쓸 때처럼 단어를 고르고 앞뒤를 맞추고 어떻게 보일까(들릴까) 신경 쓰고 하듯이, 글 쓰듯 말을 해야겠다.
올해는 반려인간을 찾는 한 해로 만들겠다고 동네방네 소문을 내고 있다. 그동안은 없어 보일까 봐 저런 말도 잘 안 하고 누군가를 소개해달라는 말도 잘 안 했는데 이것 또한 뭐 어쩌것슈222 ㅋㅋ 이 나이 먹어서야 누군가와 한 팀이 되어 가정을 꾸리고 사는 것이 별거 아닌 듯해도 꽤 중요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설적으로 사람 사는 게 별거 없다는 생각이 드니까 결혼도 한 번 해볼 만하지 않을까 싶어진 거다. 당연히 결혼 자체가 목표는 아니고 좋은 사람을 찾기 위한 노력을 열심히 해보겠다는 다짐의 표현이다.
반면 회사는 생각보다 내 손에 달려있지 않다고 느껴져 마음이 가볍다. 물론 최선을 다해 그동안 내가 쌓아온 모든 것을 때려 부을 거지만 여러 곳을 거쳐보니 회사라는 유기체는 누구 한 명에게 좌지우지되지 않는 것 같다. 그리고 타고난 기세와 운세도 중요한 것이라 그것들이 어딘가에서 막히지 않고 우리에게 잘 흘러들어올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이 나의 몫이 아닌가 한다. 이미 좋은 멤버들로 구성되어 있으니 이들의 역량을 얼마나 더 끌어낼 수 있을지는 나의 친절함에 달려있는 것 같기도 하다.
돈도 마찬가지다. 내가 쫌쫌따리 모으는 것으로 인생을 크게 뒤집기 어렵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언젠가 기회가 다가왔을 때 지렛대 역할을 해줄 정도는 갖추어야 하지 않나 하는 마음이다. 외국으로 안싸돌아다니니 큰돈 나갈 일도 없고, 엄한데 투자 안하고 얌전히 적금 붓고 있다. 가끔 가족들 외식할 때 크게 한 번 쏠 수 있을 정도로는 벌고, 앞으로도 오래 벌기 위해 지금을 투자해 공을 들이고 있으니 이것 또한 정해진대로 굴러갈 것이라 믿는다. 원하는 미래가 빠르게 다가오지 않는다고 수렁에 빠지지 않을 정도로만 멘탈을 잘 유지하면 된다고 본다.
2023년을 시작할 때는 이런저런 목표들을 많이 세웠었다. 어떤 운동을 몇 회를 꼬박꼬박 가고, 뭘 배우러 어딜 다니고, 이렇게 꽤나 구체적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올해는 굵직한 몇 가지만 떠오르고 사소한 목표들은 '아, 이건 나중에' 하고 나 스스로 쳐내고 있더라. 어떤 한 해가 되려고 이러나 싶다. 나도 욕심만 많아가지고 일단은 목표로 삼고 어떻게든 츄라이 츄라이 하는 편인데 좀 의외다. 크게 더 바랄 게 없었던 2023년처럼 2024년도 별 탈 없이 건강하게 지나가길 바란다. 마치 평양냉면집에서 주는 메밀 삶은 물처럼 따뜻하고 심심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