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절해고도? 쿨 아일랜드
한 3년 만에 제주도에 다녀왔다. 한동안 일 때문에 한 달에 두 번씩 가기도 했는데 뭔가 엮여있는 게 없으니 자연스레 발걸음이 뜸해진다. 코로나를 겪으면서 갈 수 없음과 무관하게 내가 여행에 시큰둥해진 탓도 있다. 예전 같았으면 해외여행 제한이 풀리자마자 게이트를 제일 먼저 통과했을 나인데 2020년에 만료된 여권을 아직도 갱신하지 않았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신용카드를 벅벅 긁어가며 해마다 해외여행을 다닌 사람으로서 좀 머쓱한 말이긴 하지만 자꾸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월급이 지금의 반도 안될 때도 유럽행 비행기를 턱턱 끊더니. 내가 왜 이러는지 잘 모르겠다. 마지막 해외여행이었던 포르투갈-프랑스 여행의 만족도가 진짜 높았긴 했지만 그걸로 충분했다고 하기엔 이후의 공백기가 내가 생각해도 너무 길다.
내가 한참 여행 다닐 때랑 다르게 온라인으로 볼 수 있는 게 많아져서 그런가. 유럽 박물관에 가면 식민지 장물 컬렉션, 미국에 가면 유럽 카피 파티, 일본의 소박한 맛도 하루이틀이지, 대자연은 별로 궁금하지도 않고, 궁금하고 기대되는 것이 없다 보니 자연스레 엉덩이가 무거워진다. 나에게 해외여행은 조선통신사처럼 새로운 문물을 보러 가는 건데 그 포인트에 의욕이 안 생기다 보니 큰돈을 들여 신문물을 보러 갈 엄두가 잘 나지 않는다. 그 돈을 주고 꼭 가야 하나 싶은데 내가 버는 돈이 작고 귀여운 것이 문제라면… 슬프지만 이것은 여행의 잘못이 아니라 내 잘못이다(이 와중에 나는 여행과 아주 밀접한 제품을 파는 일을 하고 있으니 정말 내 인생도 자꾸 포인트 엇나가는 측면에서 나랑 멱살잡이 한 번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그래도 국내여행은 야금야금 다닌다. 원래 운전을 배워 국내여행을 많이 다니는 게 목표였는데 아직 요원하다. 다행히 어릴 때보다 운전하는 친구들이 늘어 묻어갈 수 있게 되었다. 6월에 다녀온 경주 여행은 정말 좋았다. 최근에 그때 찍은 필름 카메라를 스캔해서 보니 다시 한번 다녀온 기분이었다. 그리고 이번 제주여행은 꽤 충동적으로 결정했다. 새로운 회사에 3개월 동안 잘 적응한 나에게 주는 선물 같은 휴가랄까. 너무 힘들어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아니고 ‘아, 그냥 좀 놀아야겠다’에 가깝다. 계획도 크게 없었다. 꼭 가보고 싶었던 곳 두어 곳만 찍어놓고 그때그때 찾아서 움직였다. 이번에도 친구 혼자 운전하느라 고생해서 그렇지 나는 너무도 개꿀이었던 것이다. 이것저것 많이 보지는 않아도 야무지게 꼭꼭 빚어놓은 것들을 보고 와서 아쉬움도 없고 마음이 그득하다.
예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수풍석 박물관도 그렇고 이타미 준 뮤지엄(유동룡박물관)도 구성과 디테일이 좋아서 오랜만에 ‘너무 좋다’를 연발했다. 어쩌다 유동룡 선생님이 제주도의 많은 건축물들을 다 해먹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분의 건축은 제주도와 참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 든다. 역시나 제주 건축에 많은 지분이 있는 안도 다다오 아저씨보다 훨씬 더 제주를 잘 이해하고 소화한 것 같다. 돌, 바람, 빛 같은 본연의 것들에 집중하면서도 고졸한 멋이 있었다. 특히나 이타미 준 뮤지엄은 공간 브랜딩, 공간 경험이라는 뻔해져 버린 단어의 정수를 느끼게 해 주었다. 입장부터 관람, 공간 구성, 오디오가이드, 기념품까지 섬세한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내가 기획하고 만들어내는 무언가도 저런 짜임새를 가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숙소였던 빌라사계도 다음에는 꼭 이틀을 묵어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만족스러웠다. 요즘 워낙 컨셉추얼 한 숙소들이 많아서 그런 곳들 중 하나겠거니 했는데 이곳 또한 경험에 엄청 신경을 많이 쓴 티가 났다. 브랜드나 크리에이티브하는 사람들이 왜 결국에는 다 호텔 같은 공간에 욕심을 낼까 생각해 보면 공간은 내 아이디어를 표현할 수 있는 총체이자 바로 느끼게 할 수 있는 고차원의 매개체 아닌가. 집의 구조부터 수건 한 장까지 내가 그리는 그림을 다 녹여낼 수가 있다. 어느 반열에 오른 사람이라면 당연히 한번쯤은 욕심내볼 만한 것 같다. 방문하는 사람들에 대한 스터디를 많이 하고 빌라사계만의 경험을 어떻게 줄 수 있을지 고민을 많이 한 게 느껴졌다. 복층 구조를 밑으로 파서 넷플릭스룸을 만들어놓은 걸 처음 봤는데 집에서는 잘 보지도 않던 영화를 두 편이나 때려 볼 정도로 몰입하기 좋은 공간이었다.
국립제주박물관도 한적하고 좋았다. 서귀포 시골 구석탱이에 있는 카페도 웨이팅을 하는 마당에 한적한 공간을 찾는 게 쉽지 않은데 의외의 장소였다. 경주에서 국립경주박물관에 가본 이후로 전국의 국립박물관 도장깨기라는 새로운 목표가 생겼는데 역시나 국립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동안 조각조각 알고 있던 제주를 한눈에 보고 실감영상실에서 나룻배도 타고 왔다(ㅋㅋ). 국중박에 갈 때마다 놀라는 거지만 진짜 우리나라도 전시 기획과 콘텐츠의 수준이 너무 높아져서 어딘가 구리거나 촌스럽다고 할 구석이 없다. 서울의 국립박물관에 비하면 당연히 규모의 차이는 있겠지만 스토리텔링이나 콘텐츠들은 박물관이 위치한 지역의 역사와 서사를 충실히 보여준다. 경주는 워낙 지역 자체가 박물관이니까 했는데 국립제주박물관까지 가보고 나니 나의 도장깨기 미션이 아주 기대되기 시작했다.
그동안 성산일출봉, 주상절리 등 지리 시간에 배운 곳부터 아르떼뮤지엄, 한림 앤트러사이트처럼 전통의 명소(?)까지 다 둘러본 덕분에 가능했던 이번 여행이 아닌가 싶다. ‘3박 4일 제주여행’ ‘서귀포맛집’ 같은 키워드 검색에 매우 부적절한 글이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나는 좋았다. 국립제주박물관 기획전 이름처럼 이번 제주는 나에게 가장 가까운 위로였다. 가장 가깝다는 말이 코로나 때처럼 여행은 가고 싶은데 외국에 못 가서, 잠깐 벗어나고 싶은데 멀리 갈 시간이 없어서 같은 이유의 대안적인 표현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다. 아주 아니라고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나는 이번 여행을 통해서 제주에, 여행에 다시 재미를 붙인 것 같다. 비우러 가기 바빴던 예전과 달리 큰 근심과 걱정 없이 눈앞에 있는 것들을 온전히 누리고 왔다.
역사적으로 마음 아픈 사건들이 있어서인지 나에게 제주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데 이상하게 좀 슬픈 섬이었다. ‘절해고도, a remote island’라는 표현을 보고 나니 그 슬픔이 더 이해가 되어버렸다. 내가 밟고 사는 땅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살면 괜찮지만 remote 된 상태라고 여긴 이상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반드시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박물관 가서 또 제주 사람들 나름대로 꾸려온 삶의 흔적을 보고 와서 그런가. 육지 사람들이 절대 가질 수 없는 엄청 멋진 바이브를 가진 사람들처럼 보였다. 그 섬만이 가진 영험한 바이브에 귀신도 무당도 많을 것 같고. 온갖 고초를 다 겪으며 끝까지 살아남은 자들의 관조적인 시선 같은 게 느껴졌다. 맨날 가던 곳이 새삼 쿨하게 느껴지다니. 나에게도 그런 반전의 기회가 있을까? 겨울 제주에 또 가보면 왠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또 가겠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