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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일제문소 Feb 06. 2024

나 홀로 집에

고령의 캥거루에게는 슬픈 전설이 있어

노부부와 함께 사는 고령의 캥거루는 수시로 독립을 꿈꾼다. 어릴 때는 주로 돈이 문제였다면 나이가 들면 돈은 계속 문제고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 서툰 부모님이 눈에 밟혀 더 어렵다. 이런 집에서 나이 든 딸은 온라인 구매를 대행하는 네이버페이이자, 양쪽 비위를 다 맞춰야 하는 고강도 분쟁의 분쟁조정위원장이자, 빠바 아닌 성수동 소금빵을 배달하는 쿠팡플렉스이자, 딱히 특별한 이유가 없는 미혼 상태에 대한 저격을 받아내는… 아무튼 여러 가지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심지어 독립을 아예 안 해봤으면 모를까 시집갈 줄 알고 언제 또 부모님과 다시 살아보겠어 하고 짐을 싸들고 들어온 누구는 오죽하겠는가. 그때 외삼촌이 들어가지 말라고 할 때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왜 괜히 효녀 감성팔이를 해가지고…


혼자 산다고 매일 술판을 벌이는 난잡한 파티걸이 되는 게 아니다. 고령의 캥거루에겐 이제 그럴 체력이 없다. 그저 어둑어둑한 간접조명 아래, 세탁기 탈수를 기다리며, 라디오를 틀어놓고, 시원한 맥주 한 캔을 따는 고요한 순간이 간절해질 뿐이다. 부모님과 함께 사는 집에서도 아예 불가능한 이벤트들은 아니다. 영 기분이 나지 않을 뿐. 이런 사소한 이유를 떠나서라도 결혼 여부와 무관하게 어떤 방식으로든 홀로서기를 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은 계속 든다. 내가 부모님 댁에서 나오는 게 아니고 부모님을 이제 나로부터 놓아드려야 하지 않을까. 서로가 눈에 안 보여야 걱정거리도 적당히 외면할 수 있는데 지척에서 서로를 걱정하다 안쓰러워하다 열받다가 하는 일상의 반복이다.


저 스피커가 너무 탐이 난다


우연한 기회가 되어 친한 선배의 서촌집에 일주일 동안 머물게 되었다. 예쁜 집도 집이지만 내가 너무 좋아하는 동네라 마다할 이유가 없어 덥석 물었다. 이것저것 다 생각하고 귀찮아하는 평소의 나와 다르게 그냥 한 번 질러봤다. 요즘은 좀 시건방지게 충동적인 선택과 결정을 해보고 싶은 상태다. 너무 생각하지 말고 이것저것 질러야 판이 바뀔 것 같은 느낌이 자꾸 든다. 판 어쩌고 하는 건 나의 똥촉일 수도 있으니 차치하더라도 오랜만에 혼자 보내는 시간이 기대되었다. 예전에 개포동에서 자취할 때 생각이 많이 났다. 그때는 사실 독립보다는 도피였다. 남이 준 상처, 내가 준 상처로부터 조금씩 나의 삶을 찾아가던 시간이었다. 결론적으로는 그 시간을 혼자 잘 보냈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아직도 나는 박효신의 ‘야생화’를 들으면 온기가 없던 그 집에 혼자 처음 들어가서 펑펑 울던 기억이 떠오른다.


잘 살아있어서 다행이야


아니나 다를까 서촌집에 와서도 혼자 살 때처럼 라디오를 틀어뒀는데 늦은 밤 그놈의 ‘야생화’가 나오는 것 아닌가. 그때의 기분은 기억이 났지만 그때와 다르게 지금의 나는 슬프지도 않고, 내가 좋아하는 공간에서, 썩 마음에 드는 은은한 조명 아래, 저 멀리 인왕산을 보며 앉아있으니 사람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싶었다. 나는 이런 순간을 좋아한다. 그 어려운 시간을 꾸역꾸역 버텨낸 내가 결국 맞이하게 되는 지금이 좋을 때 행복감이 아주 많이 고양된다. 살아있길 잘했어. 잘 살아있어서 다행이야. 그리고 이상하게 이 집에서 생활을 시작하는 그날부터 예상치 못했던 선택지들이 자꾸 나의 삶을 밀고 들어왔다. 맨날 사대문 타령을 했는데 경복궁을 바로 곁에 두어버리니 내 인생의 여러 시그널들도 지금인가 보다 하고 깜빡이 켜고 들어오는 건가.


아쉽다 아쉬워


오늘은 마지막밤이다. 고작 일주일이었지만 인왕산을 실컷 보았고 아침에 들어오는 좋은 볕을 쬐었고 식물들의 눈치를 살피며 꼬박꼬박 물도 주었다. 서촌도 나랑 헤어지는 게 아쉬웠는지 오늘은 눈까지 뿌려준다. 선배부부가 잘 꾸려놓은 집을 보면서 일이 아닌 나의 삶을 잘 꾸리는 일도 더 미루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사실 그렇게 일에 집착하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하진 않는데 오랜만에 혼자서 일을 하지 않는 시간을 보내보니까 내 시간의 너무 많은 부분을 일로 채우고 있더라. 재밌고 보람이 있어서 하는 것이라 불만은 없지만 그 이외의 나도 너무 방치하지는 말아야지. 집에 정성을 들이는 건 결국 가장 깊숙하고 솔직한 나와 편안하게 잘 지내겠다는 의지 같은 거니까. 올해는 잘 준비해서 부디 나 홀로 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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