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는 거 아는데
뮤지컬 <알라딘> 한국 초연 소식이 들린다. 나는 7 년 전인가 런던 출장길에 웨스트엔드에서 <알라딘>을 본 적이 있다. 이렇게 말하니까 나 뭔가 되게 있어 보이는데… 소싯적에 나도 굉장히 트렌드에 빠르고 말이야! 눈도 밝고 앞서가는 사람이었다!!! 아무튼, 내용은 어차피 우리가 다 아는 그 전체관람가스러운 내용이다 보니 공연장에는 아이들도 그득했다. 영어로 해서 알아듣지도 못하지만 애니메이션을 통해 대략 예상 가능한 현란한 무대를 보고 아는 노래 A whole new world 하나 들으러 간 거다. 재밌다고 하니 가볍게 보자 싶어 예매하고 간 건데 꼬맹이들 옆에서 알라딘이랑 자스민이 양탄자 타고 저 노래를 부를 때 아주 통곡을 하고 나왔다. 옆에 있던 영국 꼬마들은 저 동양인 이모가 왜 저러나 했겠지. 얘들아 이모가 너네 만할 때 말이다…
나 초등학교 때, 우리 아빠가 해외 출장도 자주 다니고 잘 나가던 시절, 아빠는 항상 디즈니 비디오테이프를 하나씩 사가지고 오셨다. 라이온킹, 알라딘 등등 당연히 자막은 없다. 대략 그림으로 때려 맞추는 거다. ‘알라딘이 뭘 훔치다 도망을 가는구나~’ 하고. 근데 그때 양탄자 타고 알라딘이랑 자스민 둘이 부르는 노래가 그렇게 좋은 거다. 대충 ‘어 홀 뉴월’ 인건 알겠는데 뭔 소린지 알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우리 반에 아빠가 외교관이라 해외에서 오래 살다 온 친구에게 부탁을 했다. “나 이거 가사랑 발음 좀 적어주라. “ 평소에도 외국인스러운 나이스함(?)을 장착하고 있던 친구는 세로로 긴 종합장에다가 저 가사를 다 적어주고 밑에 발음도 적어줬다. ‘아이 캔 쇼 유 더 월- 샤이닝 쉬머링 스플렌딛‘(소식은 모르지만 아직도 이름을 기억한다. 정연아 고맙다). 나는 그 한 장의 종이를 덜렁 들고 다니면서 보고 또 보았다. 여전히 뜻도 몰랐지만 영어로 된 노래를 내가 하나 알게 되었고, 겨우 사전을 찾아 알게 된 제목의 뜻. whole 모든, new 새로운, world 세상, 완전히 새로운 세상?
디즈니 애니메이션 OST 싫어하는 사람 어디 있겠냐만은 나는 A whole new world를 들을 때마다 새로운 세상을 너무 궁금해하던 나의 첫 모습이 떠올라 기분이 이상하다. 모르는 언어로 된 노래 하나가 마음에 들었고, 그걸 친구에게 써달라고 부탁하고, 그 종합장을 끼고 다니며 혼자 불러제끼던 그 무대뽀가 좀 귀엽지 않은가. 맞든 틀리든 그냥 들리는 대로 따라 불러도 되고, 엄마한테 해달라고 하면서 엄마를 난감하게 만들 수도 있을 텐데. 굳이 외국에서 오래 살다와서 원어민 발음을 가진 친구를 찾아가 ‘나 이것 좀 알려다오’ 하는 게 너무 지금의 나와 비슷해서 인간 참으로 안 변하는구나 싶다. 궁금한 것은 못 참고, 서툴고 모자란 것은 영 싫고, 어떻게든 혼자 애써보는 것이 그냥 지금 오늘의 나 아닌가. 다만 조금 더 안타까운 것은 10살의 나와 다르게 40살의 나는 세상의 눈치도 많이 보고 모르는 걸 모른다고 말하는 게 조금 두려워졌다는 점이다.
이제는 A whole new world가 얼마나 철딱서니 없고 낭만적인 소리인지 장광설을 늘어놓고,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는 과격한 소리가 먼저 나와버리는 내가 되었다. 예전에는 애써 공들여 가꾼 세계의 문이 하나씩 닫힐 때마다 그에 대한 슬픔과 아쉬움에 비례해서 ‘완전히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감이 있었다. 요즘은 그런 기대감을 찾는 것이 제일 어렵다. 삶에서 붕 떠있는 설렘중독자들을 경계하지만 그렇다고 염세적인 사람이 되고 싶지도 않다. 자꾸 눈에 불을 켜고 뭘 찾으려고 하다 보니 더 안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새로운 관심과 기대감이 자기 발로 비집고 나를 뚫고 나오도록 아무것도 안 하고 있어 보는 것도 방법이 아닐까. 오히려 가만히 눈을 감고 시간을 흘러보내며 기다려보는 건 어떨까. 아마 내 성격상 조금만 짜져있다보면 심심해서 다시 세상구경하러, 사람구경하러 다니겠지. 기다려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