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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마 Nov 23. 2023

번아웃으로 퇴사 후 치앙마이 한달살기 3주째_2

평화를 찾아 떠난 여행 진척도 60%, 만족도도 꽉 찬 60%

한 달 살기라는 여행 방식과 번아웃의 회복에 치앙마이가 잘 맞는 도시인가에 대한 질문에는 딱 60% 정도 YES라고 할 수 있다. 돈이 더 있었다면 아마 베를린이나 리스본에서 좀 더 행복했을 수도 있다. 더위로 고생한 1-2주차에 특히 그 생각을 많이 했다. 정처 없이 걸어 다니며 도시를 탐색하고 싶은데 그러기에 이 나라는 너무 덥고, 대중교통이 없어서 무조건 택시를 타야 하고, 도시 인프라가 좋지 않다. 인도가 거의 없고 횡단보도도 의미 없어 도보여행자를 위한 나라가 아니다. 도시 경관 면에서도 유럽에 비해서는 아쉬운 점이 많다. 물론 제국주의의 역사에서 왜 이렇게 되었는지 알고, 같은 아시아인으로서 안타까움도 있으나 여행객으로 느끼는 것은 그와 별개의 문제니까. 유명한 카페가 많다고 해서 기대했는데 커피의 맛이나 다양성 면에서도 완전히 기대 이하였다. 실망스러운 커피 대신 아이스티로 연명했다.



다만 물가가 거의 10배 이상 차이가 나니 거기서 느껴지는 만족감이 있었다(저물가 저임금의 문제점은 차치하고라도). 한정된 자원을 가지고 최대한 오랜 기간 버텨야 하는 퇴사자로서 물가는 중요한 기준이다. 여행자로서도 물가가 싸다는 건 실패나 낭비에 대한 부담이 적다는 것이고 그만큼 시행착오에 대한 자책을 줄여준다. 메뉴를 잘못시켜서 맛이 없네? 새거 하나 더 시키지 뭐. 버스 티켓을 잘못 끊어서 돈을 날렸네? 삼천 원쯤인데 흘렸다 치지 뭐. 뭐든 조금 잘못해도 쿨하게 넘어갈 수 있다.


60%의 YES에서 절반 이상은 태국 음식이 차지했다. 3천 원이 안 되는 돈으로 한국에서는 1-2만 원이 넘어가는 타이 요리를 배가 터지게 먹을 수 있다. 생선부터 소프트크랩, 돼지고기, 치킨, 바질과 파파야까지 식재료와 풍부한 맛이 넘쳐난다. 번아웃이 왔을 때 식욕부터 사라졌고 몸무게가 인생 최저를 찍고 있었는데 여기 오자마자 팟타이부터 푸팟퐁커리, 쏨땀과 똠양꿍으로 삼시세끼를 챙겨 먹으며 요가와 수영을 하니 몸이 건강해지는 게 느껴진다. 아마 베를린이나 리스본에서는 이렇게까지 잘 챙겨 먹지 못했을 것이다. 거기의 음식이란 좀 팍팍하고 단순한 맛들이니까. 역시 감각을 되살리는 데에는 강렬하고 화려한 것이 필요하다.


일찍 일어나 숙소에서 아침 먹고 씻지도 않은 채 요가를 다녀오고 수영장에 가서 샤워 후 한 시간 수영, 점심을 먹고 숙소에서 낮잠을 잔 뒤 카페에서 읽거나 쓰다가 저녁 식사, 라이브 재즈바에서 맥주 한잔을 하는 게 나의 3주 동안의 일과였다. 사원이나 관광지는 한 번도 가지 않았고 마사지도 그리 좋아하지 않아서 다녀오지 않았다. 이 단순한 일상을 굳이 무더운 나라에서 하려고 거기까지 갔냐는 남자친구의 타박도 일리가 있었다. 서울에서도 모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먼 도시에 한 달 동안 스스로를 가둬두고 찾으려고 했던 것이 무엇인지 나는 안다. 서울에는, 내 일상에는 없다고 생각했던 평화였다. 일하느라 잃어버린 스스로의 균형감각이었다.



아주 힘들게 올라간 트레킹 코스인 ‘Monk’s Trail’과 주말 시장인 ’찡짜이 마켓‘에서 내가 찾던 평온을 발견했다. 사실 치앙마이에 와서 가장 후회하던 순간이 그 Monk’s Trail을 올라가는 길이었다. 미쳤다고 야생동물이 튀어나올 것 같고 이정표도 없는 흙길을 올라가고 있나 생각했는데 그렇게 도착한 사원이 너무 평온했다. 개울이 흐르고 꽃 목걸이를 걸어둔 불상이 여기저기 놓여있고 여행객과 현지인이 그 사이를 조심히 걷고 있었다. 모두가 그 사원의 평화에 경탄하며 각자 무언가를 빌고 있었다. 개울에서 돌탑을 쌓고 불상의 발치에 꽃을 올리며 끊임없이 염원하고 있었다.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사원에 적혀있는 가이드대로 기도하며 아무것도 빌지 않았다. 그저 감사했다.  여기를 누가 나에게 올라가 보라고 추천해 주었던 것에 대해. 중간에 정말 크게 후회하면서도 결국은 사원까지 도착한 것에 대해. 나를 좀먹던 회사를 그만두었고 아직까지는 불안함을 잘 끌어안고 있음에 대해. 여행이 끝나면 돌아갈 곳이 있고 반겨줄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대해. 그때만큼은 아무것도 불안하지 않았다.


주말 마켓인 ‘찡짜이 마켓’은 금요일은 저녁에, 토&일요일은 오전에 열린다. 나는 그 정보를 모르고 우연히도 딱 그 오픈 시간대에 마켓을 방문했다. 젊고 감각 넘치는 치앙마이 사람들과 농부들은 모두 거기에 모여있는 것 같았다. 직접 만든 가죽, 뜨개, 금속공예 등의 핸드메이드 제품을 가지고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서있었다. 마켓에서 판매하는 수많은 음식 중에서 돼지고기튀김과 밥을 주문했는데 처음 보는 파란 꽃을 꽂아주었고, 어느 레스토랑보다도 맛있었다.

마켓에서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쇼핑을 하고도 한참을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여행자들의 설레는 눈빛과 현지인의 여유로운 바이브가 모여 있었다. 커다란 개를 데려온 현지인이 무서워하는 어린 여자아이에게 개와 인사하는 법을 알려주는 모습을 보다가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세상에는 아직도 너무 많은 아름다운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직 만나지 못한, 어쩌면 영원히 보지 못할 아름다운 것이 세상에 가득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치앙마이의 가장 좋았던 점은 모든 사람이 언제든 곧바로 춤출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이다. 카페에서 뭔가 똑딱거려서 고개를 드니 맨발의 손님이 흘러나오는 노래에 맞춰 손가락을 튕기고 춤을 추며 지나간 장면은 내가 이 도시에서 본 가장 인상적이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모두가 작은 즐거움에 언제든 몸을 맡길 준비가 되어있는 여행자의 도시. 매일 떠나가는 여행자와 함께 사는 것에 익숙한 로컬들의 도시. 그곳에서 급할 것 없이 한 달을 보내며 느슨하고 헐렁한 날을 함께 할 수 있어 행복했다. 아직 남은 2주는 더더욱 그 맨발의 손님처럼 살아야지. 한국에 돌아가서 폭풍에 휩쓸리고 결국 또다시 버닝 되더라도 세상에는 그런 작은 즐거움이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지. 그 순간을 일상 속의 나도 손가락을 튕기며 만끽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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