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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마 Feb 18. 2024

낭비지만 괜찮아, 만년필 예찬론

 지적허영심이 뚱뚱해지는 최고의 사치품


요즘도 누가 만년필을.. 쓰나?

지금까지 나 말고는 만년필을 쓰는 사람을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나조차도 학창시절에 사용하고, 그 후에는 아이패드로 넘어가서 만년필의 존재를 한참 잊고 있던 터였다. 실용적인 모델로 회사에서 잠깐 사용해보기도 했지만 바빠 죽겠는데 만년필이 안 나오기라도 하면 화딱지가 나더라. 그렇게 처박아두고 잊어버렸다. 대부분의 취미 용품이 그랬듯이.


최근에 우연히 만년필을 다시 접하게 됐는데 신기하게도 요즘은 쓰는 사람들이 꽤나 있다. 코로나 시대를 거치며 집에서 꼬약꼬약 뭔가를 하는 것에 취미를 붙인 사람들의 종착지가 만년필인 것 같았다. 나의 게이트가 공부였다면 요즘은 필사, 필기체, 캘리그래피, 드로잉 등의 영역에서 만년필이 꽤 애정을 받고 있었다. 만년필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엄청 비싸기만 하지는 않다. 싼 건 1만 원 이하로도 살 수 있고, 다이소에는 무려 1천 원 짜리도 있다. 특히 내가 흥미를 잃었던 시기에 저가 브랜드가 새롭게 나타났는데 트위스비, 홍디안 같은 대만, 중국 브랜드는 1만 원~3만 원 내에 꽤 괜찮은 퀄리티의 만년필을 살 수 있더라. 다이소나 문구점의 근본 없는 만년필이 아니라 제대로 된 브랜드 만년필이 그 가격이라는 건 꽤 놀라운 일이었다. 내가 만년필을 좋아하던 시기에는(라떼는) 라미 브랜드나 플래티넘의 프레피 라인 정도만 있었으니 저가 모델 선택지가 늘어난 것도 만년필이 각광받는 이유 중 하나일 듯하다.  


장롱 속 만년필을 다시 꺼내 닦고 잉크를 넣어 써보며 이제 더 이상 ‘필기’를 하지 않아도 되는 나이의 사용자에게 만년필이 어떤 의미일지 생각해 봤다. 다시 써보니 또 재밌더라. 지적허영심의 최고봉, 활자중독자들의 최고 사치품 만년필의 세계를 열어버린 기분이다.


만년필의 제일 큰 재미는 브랜드

사람들은 대부분 대표적인 만년필로 몽블랑을 생각하지만 난 몽블랑이 너무 노땅 같다고 생각해 왔다. 고가 선물에 어울리고 글씨를 쓰는 것보다 싸인을 해야 할 것 같은 브랜드랄까. ‘나 돈 많다’ 티 내는 것 같고 지적허영이 아니라 진짜 허영심을 드러내는 것 같아서 거부감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스스로에게 40대 기념 선물 같은 것을 준다면 좋은 와인과 몽블랑이 좋겠다 생각하기도 했다. 그만큼 기념비적인 브랜드이기 때문.


처음 만년필을 접했을 때는 미국 ‘워터맨’사를 제일 좋아했다. 첫 만년필도 워터맨의 ‘필레아’였다. 지금은 단종됐는데 상위모델을 팀킬할 만큼 잘 만들었다는 평을 받던 모델이다. 엄마를 졸라 구입했는데 그 당시 꽤 비싼 6만 원대 만년필이었고, 고등학교 내내 잘 썼다. 학교에서 만년필 잉크를 충전하다가 친구 교복 셔츠에 쏟아버려서 엄마가 셔츠값을 물어준 경우도 있었다.(돈이 꽤 드는 딸내미였던 듯) 다만 대학에 붙고 나니 그 만년필을 보면 자꾸 고3 시기가 떠올라서 잘 닦아서 넣어두었다.


만년필은 브랜드마다 고유의 스토리나 모티브가 있다. 몽블랑은 다들 알다시피 뚜껑 캡탑의 알프스 봉우리를 뜻하는 하얀 무늬가 상징이다. 워터맨은 브랜드 창시자 워터맨이 보험 계약을 하다가 잉크가 엎질러져 계약을 못한 것이 분해 만년필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다.(실제로는 시계공이었고 보험 얘기는 마케팅용이라는 썰도있다) 독일 브랜드인 ‘펠리칸’은 펠리칸의 부리 모양이 클립에 있고, 미국 ‘파카’는 화살촉 모양 클립이 상징이다. 적어도 100년이 넘은 브랜드들의 히스토리에 이끌려 만년필을 처음 알게 된 사람으로서, 무언가를 쓰겠다는 인간의 의욕이 쌓아 올린 브랜드 이야기가 만년필을 고를 때의 가장 재밌는 요소라고 생각한다. 전쟁 때 편지를 쓰는 군인들 덕분에 브랜드가 폭발적으로 성장하기도 하고(미국 ’파카‘),  특유의 화려함으로 다이아가 박힌 만년필을 만들기도 하는 등(이탈리아 ‘오로라’) 브랜드마다 살아남는 법도, 만드는 만년필도 천차만별이다. 각 브랜드마다 자국의 작품이나 예술가를 모티브로 내는 한정판도 재밌는 구경거리다. 브랜드마다의 상징이 뭔지, 한정판은 어떤 걸 내는지 구경하다 보면 꼭 만년필을 사지 않아도 즐겁고 흥미롭다.


감각의 낭비가 주는 위안

똑딱하면 글쓰기가 시작되는 볼펜보다 만년필은 사용할 때 약간의 번거로움이 있다. 필기구의 발전 과정에서 볼펜보다 이전 단계이니 당연한 일이다. 다만 그 번거로움 덕분에 누릴 수 있는 재미들이 바로 만년필의 본질이다. 볼이 굴러가는 볼펜과는 달리 정지된 금속으로 종이 위에 잉크를 얹는 형태인 만년필은 그만의 묘한 사각거리는 필감이 있는데 이게 바로 만년필을 자꾸 쓰게 만드는 포인트다. 볼펜보다 손의 힘을 훨씬 덜 들이고도 글씨를 쓸 수 있고, 내 글씨의 획 방향과 필압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만큼 만년필로 쓰는 글씨는 볼펜 글씨와는 달리 잉크의 존재를 더 확실히 느끼게 해 준다. 그렇다고 글씨가 예뻐진다거나 글씨 쓰기가 더 쉽다는 것은 아니다. 쉽거나 실용적인 분야와는 다른, ‘새로운’ 글씨 쓰기이자 좀 더 감각적인 미학이 있는 필기구라는 것이 핵심이다.  


오랜만에 만년필을 다시 써본 사람으로서, 이제 더 이상 실용을 위한 필기구가 필요 없어진 사용자로서, 만년필의 감각적인 면은 나에게 새로운 장을 열었다. 물론 고등학생 때도 잉크의 색이나 필감 같은 것을 즐기며 사용했지만 결국은 실용성을 배제할 수 없었는데 지금의 나는 오롯이 만년필의 감각만을 즐길 수 있었고 이때 가장 좋은 사용법은 ’필사‘였다. 누가 시켜서 하는게 아니라 스스로 하는 필사는 생각보다 재밌는 취미였다. 나는 글씨를 엄청 못쓰고, 내 글씨를 나도 잘 못알아보는 악필이며, 교정할 생각도 별로 없다.(키보드 사랑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씨를 쓰는 행위 자체는 꽤 고요한 위안과 침착함을 주더라. 누구에게 보여줄 것도 아니고, 내가 다시 볼 것도 아니며, 오직 좋아하는 글을 내 손으로 직접 써보기 위한 필사. 만년필의 사각거림과 잉크의 색을 오직 쓰는 순간만 즐기려고 하는 진정한 낭비. 책을 좋아하고 활자를 즐겨 읽고 쓰는 사람으로서 이토록 만족스러운 사치가 또 있을까. 기록을 위한 것이 아닌 쓰는 행위 그 자체를 위한 글씨쓰기에 만년필은 완벽한 도구다.


잉크와 종이의 조합은 만년필의 종착지가 아니라 시작점이다. 1천원짜리 만년필이라도 일단 써보면 느낄 수 있다. 종이마다의 필감이 얼마나 다른지. 난 말했듯 사치스러운 낭비 필사를 하고 있기에 최대한 종이에 돈을 들이지 않고 있지만 최소한 만년필 전용 노트를 쓰고 있다. 잉크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만 가끔 사 모은다. 만년필에는 글씨 두께를 결정하는 EF, F, B, M 등의 펜촉 종류가 있는데 얇고 두꺼운 차이에 따라 잉크의 표현 또한 천지차이다. 좋아하는 잉크를 새 만년필에 넣어보고 예쁜 색과 농담이 나올 때의 즐거움. 사소한 그 순간이 자꾸 만년필의 세계에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매력이다.


허영심은 맞지만 옷보다 낫다고 생각해

만년필의 가격은 사실 크게 중요하지 않다. 플라스틱, 레진, 수지, 셀룰로오스 등 만년필의 몸통 재질은 50만원 이하에서는 거의 다 비슷하다. 10만원짜리와 30만원짜리는 마감 퀄리티의 차이일 뿐 몸체와 구조에는 거의 차이가 없고 오직 펜촉의 소재만 다른 경우도 있다. 펜촉이 금이냐 금 도금이냐가 만년필의 가격을 판가름하는 중요한 요소이고 소재에 따라 필감이 달라지는데, 생각보다 도금의 필감을 더 좋아하는 경우도 있다. 즉 필기감의 취향이 꼭 금촉이어야 하는게 아니라면 저가 라인에서도 만족도가 높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 비싼 만년필을 사고 싶어지는 이유는 만년필이 기호품이어서다. 이미 실용성이나 합리적인 소비 면에서 멀어진 용품인 것이다. 만년필을 좋아한다는 건 글을 좋아하는 뜻이고, 작가들이 쓰는 그런 만년필스러운 만년필을 쓰고 싶다는 욕구가 없을 수 없다. 무엇보다 비싼 만년필은 다른 건 차이가 없을지언정 펜촉 하나만큼은 확실히 다르다. 정말 작지만 큰 차이인 그놈의 펜촉은 금이냐 도금이냐, 사이즈가 크냐 작냐, 얼마나 섬세한 세공이 들어가있냐에 따라 필기감부터 디자인이 천지차이로 바뀐다. 뚜껑을 열고 글씨를 쓰는 사용자는 다른 무엇보다도 펜촉을 가장 많이 보고 느끼게 되고, 그 한 가지 차이만으로도 몇 십만원의 금액을 더 지불하게 된다.


필사, 드로잉, 캘리그라피 모두 볼펜으로도 할 수 있다. 만년필은 그 자체로 이미 허영심이다. 나는 그래도 만년필을 사 모을 때의 마음이 옷을 사 모을 때보다 덜 허하다고 느낀다. 옷은 아무리 자기 만족이 있다 한들 외적인 요소다. 만년필은, 난 거의 들고 나가지도 않고 집에서만 끄적끄적 사용한다. 그럼에도 몇 십만원짜리 코트를 입을 때만큼 몇 십만원짜리 만년필 뚜껑을 뾱 열 때 기분이 좋다. 그 만년필에 잉크를 넣고, 개발새발이지만 소중한 내 글씨체로 무언가를 끄적이고, 소중하게 펜 파우치에 넣어둘 때의 만족감은 들인 돈을 상회한다. 나의 자존감을 채우기 위한 지출 중에서 헤어샵, 네일, 구두보다 만년필, 잉크가 더 마음을 평화롭게 안정시킨다. 멋져보이는 사람이 되기 위한 사치가 아니라 멋을 스스로 즐기기 위한 사치다.


50대 남성과 20대 여성이 공존하는 이상한 취미

만년필 커뮤니티 등을 보면 재밌는게 젊은 남성은 거의 없다. 고가 만년필에 심취하고 몽블랑을 이미 몇 자루 가지고 있는 50대 이상 남성, 또는 이제 막 필사를 시작하거나 잉크 색깔놀이에 재미 들린 20-30대 여성들이다. 만년필을 비롯한 필기구, 문구류나 종이에 관심 가지는 나이대가 실생활에서는 접점이 거의 없는 양극단이라는게 흥미로웠다.


정말 개인적이고 조심스러운 의견으로는, 만년필 좋아하는 20-30대 여성들이 다꾸 같은건 안했으면 좋겠다. 문구를 좋아하다보니 그 두 가지의 관심사가 대부분 같이 가는 것 같더라. 붙이고 사라질 스티커나 마테 등에 몇 십만원을 쓰지 말고 차라리 그 돈으로 좋은 만년필을 들였으면 좋겠다. 핑크색 소모품들에 돈을 낭비하지 말고 오래 남는 비싼 물건 하나를 들여서 평생 잘 썼으면. 꼬물꼬물 작은 꾸미기보다 크게 싸인하는 삶을 꿈꿨으면. 꿈틀대는 지적허영심이 부디 독서 인구를 늘리고, 읽고 쓰기를 즐기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으면. 이런 생각이 꼰대라면 할 말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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