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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닷 May 23. 2024

선생님 옷소매를 만져봐

자, 선생님 옷소매 만져봐. 어때? 얇지?
이번엔 네 옷소매를 만져봐, 훨씬 두껍지?
지금 바깥은 여름이 오고 있어.
날씨가 이렇게 바뀌면 옷도 바꿔서 입어야 하는 거야.
내일 아침에는 선생님 옷처럼 얇은 긴소매의 옷이나
다른 친구들처럼 반팔 길이의 옷을 찾아서 입고 와 보자.
할 수 있지?


고작 초등학교 3학년. 아이는 알듯 모를듯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엄마 아빠가 있지만 없는 것과 같은 상황의 아이를 보다 못한 복지교사가 세심한 간섭을 했다. 아이의 부모도, 환경도 바꿔줄 수 없다면 아이를 더 단단하게 키우자. 교직원들이 함께 내린 결론이다.



네가 아침에 동생도 깨워서 데리고 와야 해.
학교에 와야 선생님이 아침밥도 줄 수 있고, 머리도 빗겨 줄 수 있어. 할 수  있지?
그리고 저녁에 집에 들어가면 샴푸 칠 해서 스스로 씻자.
이제 3학년이면 엄마, 아빠가 말 안 해줘도 충분히 혼자 할 수 있어. 자 약속!
내일은 꼭 씻고 오는 거야~!


2학년, 3학년인 두 남매는 오뉴월 땡볕에 짧닥막한 겨울옷을 입고 깡마른 목덜미 아래로 땀을 비죽비죽 흘리고 있었다. 지난주도 이번주도 매일 같은 옷에 같은 냄새를 풍기며 등교하는 모습을 보다 못한 선생님이 다짐받듯 엄마 잔소리를 꼭꼭 씹어 먹였다. 거대한 실타래가 제 아무리 엉망으로 엉켜 있어도 교사는 아이 앞에서 먼저 손을 놓을 수 없다. 그러니 작은 실마리라도 붙들고 하나씩 문제를 해결해 주어야 한다. 선생님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엄마대신 아빠대신 두 남매의 삶에 사랑을 수시로 보태고 있다.


소풍날 연락 없이 나타나지 않는 한 아이의 가정에  교장선생님이 찾아가는 일도 있었다. 야근 후 골아떨어진 엄마와 늦잠에 빠져있는 아이를 깨워 소풍 장소까지 직접 태워다 주었다는 일화는 놀랍지도 않다. 어떤 방법으로도 저 아이들의 결핍을 다 채워줄 수 없겠지만 부디 단단한 어른으로 자라주기를 욕심내 본다. 그런 욕심이라도 부리지 않으면 같은 하늘아래 숨 쉬는 어른으로서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없을 테니 말이다.


고작 10분 거리의 강 하나를 건너왔을 뿐인데 작년에 근무하던 학교와 지금 근무하는 학교의 분위기가 극과 극 체험 수준이다. 작년에 근무하던 도서관에서는 신발, 파카, 가방 등 아무리 고가의 물건을 잃어버리고 가도 되찾으러 오는 아이가 드물었고, 입학할 때 한글은 물론 기본 파닉스 정도는 얼추 웅얼거리며 입학하는 아이들을 만났었다. 독서교육의 기본기 역시 탄탄했던 녀석들은 쉬는 시간에 무시로 도서관에 놀러 와 그림책을 장난감 삼아 앤서니브라운과 백희나의 작품을 알은 채 했었다.


올해 근무하는 학교에서는 아직 이렇다 할 독서지도의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다. 눈높이 조절 레버가 고장 나 버린 것 같다. 이 아이들은 정확히 12년 뒤에 사회에서 저 강 건너 아이들과 공정과 민주주의라는 깃발아래 공평한 경쟁을 강요받게 될 것이다. 대체 어떤 무기를 이 아이들의 손에 들려주어야 시작이 공평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래도 대한민국에서 제일 가성비 좋은 치트키는 독서인데... 평생독자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지 못하면 어쩌나? 이전에 경험 해 본적 없는 한산한 도서관 구석에서 자꾸 두려운 마음이 앞을 막아선다. 마구잡이로 엉킨 실타래 앞에서 더듬더듬 실마리를 찾아보지만 고작 화내고 눈물이나 찔끔거리는 촌 동네 사서의 눈에 그런 것이 보일리가 없다.


예견된 사회갈등 앞에서 공동체 속 큰 어른들의 협업과 혜안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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